후기들, 뒷심좀 발휘해줘요!ㅋㅋ


 

 

다들 개강하면서 후기 stop 이네요ㅠ 아니면 반응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건가요?

 

저도 테마 연재~ 김범태 기자님의 사진들을 보니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 너무 많더라구요…

하나 둘 정리합니다.

 

“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미약하리라”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ㅋㅋ

 

 

선생님이 되어 쓰는 후기 2 – 출발

– 출발
나는 따로 여행을 계획해서 혼자 먼저 출국했다. 금요일 아침 일찍 먼저 출발해서 가면서 마지막으로 건강교육자료를 확인하고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하여 태국에서 경유를 하게 되었다. 가기전에는 경유라는 것이 힘든지 몰랐는데~ 한시간 경유랑 7시간 경유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경유를 오래한다고 해서 또 혼자 해야하는 경유라 잠이나 자자란 생각에 밤을 새고 출발했는데 불편하다보니 비행기에서도 공항에서도 자도자도 시간은 가지 않는 것 같고, 음식을 사먹어도 시간은 얼마 안지나고… 배도 안 고프고….. 이래서 이런 도전은 젊을때 해야하는 건가요;;;;;; 암튼 이래저래 경유 7시간하고 라오스에 밤9시경에 도착했다. 처음 온 라오스는 여타 다른 동남아랑 다를 바가 없었다. 먼저 나를 반긴 정말 좋은 ㅎㅎ 호텔에서 푹 쉬었다. – 이 호텔은 나중에 동우가 출발하기전 하루밤 자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ㅎㅎㅎㅎㅎ

다음날 맞이한 안식일에 현지에서 일하시는 오이사님과 한여울언니와 함께 교회를 가서 예배를 드렸다. 아예 모르는 라오어의 설교와 잘 모르는 영어의 통역을 들으며…..
그리고 그때 민서준학생을 처음으로 만났다. 같이 금요일에 도착했다는데 할말도 없고 같은 호텔도 아니라 실망감이 컸다. 정말 심심했는데…서준이의 첫인상은 정말 유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이렇게 근사한 아이를 첫눈엔 알아보지 못했다. ㅎㅎㅎ
점심을 먹었는데…. 식사를 손으로 먹는 문화적 충격에 휩싸여 밥만 조금만 먹고 나와서 봉사대에 대한 밥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것보다 심심함과 외로움에 둘러싸여 얼른 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팀들이 오자마자 할 것은 자는 것밖에 없었다. 난 이야기 하고픈데~~~  피곤한 현정언니의 모습을 보며 난 정말 내년에는 안 와야지. 저렇게 일하다가 바로 와서 봉사할 수 없어. 봉사가 안될꺼 같아란 생각만 가득했다. 

그 다음날 아침 준비를 다하고 아침식사를 하는데 학생예배에 함께 드릴 사람은 오라길래 궁금하진 않았지만…. 선생님들이 나를 학생에 정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셨는지…. 생각보다 관심은 없었지만….. 선생님들 가시기에 따라가봤다. 갔는데 진짜 모르는 학생이 아는 학생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선생님으로 봉사대 오실때에 민망해 했구나…. 라는 것을 새삼 느끼며… 솔직히 2009년 이후에 들어온 학생들부터 신입생, 그리고 타과생은 얼굴을 아는 애들도 있어도  낯설고 불편했다. 미안 애들아…… 
출발하면서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래도 나름 선생님이라고 학생들이 먼저 알아봐준다 ㅎㅎ 먼저 인사하고 ㅎㅎ 이건 정말 좋은데 ㅎㅎ

필리핀 국내선보다 작은 라오스에어라인 국내선은 프로펠러로 가는 비행기였다. 국내선 타고 가는데 올라가자 마자 얼마 안 있다가 다시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에 나는 지혁신덕부장님이랑 같이 소그룹에 대해 짧은 브리핑을 마쳤다. 그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제대로 들었을지…. 
그리고 소그룹의 진행에서는 손때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끝날때까지 그러진 못하고 오히려 더 붙들고 있었지만.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고 약 1시간 안되게 차를 타고, 학생들은 트럭뒤에 실려서 ㅋㅋ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를 갔을땐 그 충격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건 뭐…..이제껏 내가 갔던 스마봉사대5번, 그리고 사랑나눔의사회랑 갔던 1번의 봉사대의 숙소에 비해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었다. 벌레들이 자유롭게 비행을하고 여기저기에 바퀴벌레를 비롯한 여러가지 벌레들이 한국과는 다른 사이즈를 뽐내며 침대도 딱딱한 나무에 돗자리 하나만 깔려있기에 침낭을 미리 공동구매를 했다는 것하나만으로 위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왜 선생님 숙소를 거절했을까에 대한 후회만 맘속에 가득했다. 나름 선생님들이 학생프로그램에 같이 참여를 안하는 것은 봉사대의 반만 하고 간다는 생각으로 학생프로그램도 다 같이 참석하려는 생각으로 학생숙소에서 잔다 하건데……  그리고…. 자유의지없이 나랑 함께 끌려서 학생숙소에 온 현정언니에게 미안해졌다. 언니는 나 아니였어도 학생숙소에 갔을 꺼야… 라고 스스로 맘의 위로를 하며~~

그 후에 간 선생님 숙소는 외관상 우리보다는 나아 보였으며 각방에 샤워시설이 있다는 것 하나가 왜이리 부러운지ㅜㅜ 그러나…. 거기도 조금 나았을뿐…
쌀국수집에가 점심식사를 했다. 여전히 베지테리안과 육식으로 나뉘어 식사를 했고. 쌀국수가 왜이리 밍밍한지 팍치가 들어가 향이 강하고…. 난 라오스에 안 맞는 구나란 생각만 하게 되었다.

그 후에 진료를 하게될 병원에 가서 환영인사를 하는데 내가 선생님으로 소개하니 왜이리 어색한지…. 마음과 외모는(?) 학생같은데….. 
그후 여러가지 세팅을 했다.
나는 진료팀에 참석하기도 뭐하고… 과가 없으니 따로 진료실에 뭐가 필요한지도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하니…. 다른 데 도와주기도 뭐하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조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선생님으로 본을 못보였군..;; 반성합니다.^^;; 
시간이 없어 리허설못하고 말로만 한번 돌린 다음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그 다음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소그룹시간. 약국팀과 몇몇 아이들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숙소로 돌아가 소그룹시간을 가졌다. 선생님들은 안오는 것에 대해 섭섭했지만.  찬양을 부르는데 얼마나 좋던지. 방가득 울려퍼지는 찬양소리가 감동이었다. 정말 안 오신 선생님들… 좋은 시간을 놓치신 겁니다.
그리고 신덕부장님의 말씀 – 정말 좋은 곳이지 않냐고 핸드폰도 안되고 카톡도 안되고 집에 갈필요도 없고. 말씀을 보기에 얼마나 좋은 환경인지. 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인터넷이 되었다면 정말 카톡하느라 정신이 없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난 오로지 말씀과 기도 찬양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게 정말 큰 감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같이 소그룹을 했는데 내용은 구원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구원을 받는 경험으로 더 나은 본향을 꿈꾼다는 내용이었다. 
우리조는 정말 심화반이었다. 강기훈선생님을 필두로 구원 자연언니 초아 서준  다형. 정말 내가 준비한 것 이상으로 많은 말씀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죠?
같이 기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씻으러 갔으나 물이 빠지지 않아 물을 다른 곳으로 계속 퍼내고 나서야 씻게 되었다. 이 생활은 그곳을 나오는 날까지 계속 지속되었다…ㅜ.ㅜ
잠을 청하였는데 너무나 딱딱해서 허리가 아파 제대로 잠도 못자고 그 다음날, 봉사를 시작해야 했다.

선생님이 되어 쓰는 후기 – 가기전

항상 봉사대가 출발하기도 전에 끝나는 후기로 원망을 들어서 짧게 끄적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보장은 못합니다. ㅋㅋㅋㅋㅋ

가기전엔 항상 봉사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함께 걱정도 많았다. 다들 졸업하면 알겠지만 일반의가 할 수 있는 건 얼마 안되니까. 환자가 많지 않을꺼라 그래서 학생이 적다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던건 진료안하고 학생일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하지만 학생이 적은건 졸업하여 선생님이 된 나에게 학생때도 안해본 소그룹교제 만드는 일을 하게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소그룹 교제를 만드는 일은 나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엔 정말 하기 부담이 컸다는거…..
학생때는 항상 신앙의 롤러코스터를 탔다면 일할때는 신앙의 자이로드롭을 탄달까….
정말 인턴시작하고 한동안은 말씀에 대한 갈망이 말할 수 없을정도로 컸었다. 교회를 못가니까. 말씀읽을 시간도 보장할 수 없기에 성경공부는 꿈도 못꾸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갈망도 적어진 나는 인턴이 끝난 뒤에 너무나 큰 수렁속에 있었다. 적어도 신앙이 아예 바닥에서 헤메일까봐 레지던트를 1년을 미루고 시작된 
GP생활에서 이제 조금씩 다시 돌아오고 있는데….. 
처음에 소그룹교제를 만들라고 부탁받았을때는 ‘도와만줄께’라 거절했지만 봉사대신덕부장이 방학이 출국하루전에 시작한다는 소리에…. 울며겨자먹기로 시작한 소그룹인데…. 이렇게 애착이가게 될줄은 몰랐다.
평소에 좋아하던 목사님의 설교문을 받아 읽고 또 읽고 교제용으로 편집하면서 단기 알바로 대진을 하면서 낮엔 진료 밤엔 교제만들기를 하면서 정말 나는 왜 사서 고생일까, 왜 거절을 안 했을까 후회하던 때가 있었다.
하나를 맡으니 두개를 맡게 되고…. 교제 만들면서 잠도 제대로 못자는데 건강교육을 확인해 달라는 메일에 건강교육까지 검토하데 되었다. 역시 시간맞춰내는 사람이 없다는건 전이나 지금이나….
건강교육을 검토하는데 정말정말 미안한건 산부인과에 대한 자료를 보는데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봐도 고칠것이 넘 많아서 이건 아니지 하며 다시 해보내라 했는데 알고보니 본과1학년이라는 거다. 아…. 암것도 모르니까 아예 헤메는 구나 싶었다. 차근차근 가르쳐주지 못해 미안해….
암튼 선생님이면서 학생처럼… 그래도 학생때보단 준비를 덜했지만 어느정도 준비해서 가게된 봉사대..
언니를 데리고 가면서 걱정이 좀더 크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행복하게 끝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정말 라오스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과 스마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후기 #3. 23일(월)

무료진료 첫날이다.

 

전날 밤에 배낭을 꺼낼 틈도 없이 돗자리에 쓰러져 잠들었다. 잠들기 직전에 6시로 모닝콜을 맞추어 두었는데, 모닝콜이 울리기 전 새벽에 추워서 잠에서 깼다. 일어나 씻고 모여서 봉사대 책자에 있는 말씀을 읽으면서 아침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 아침 식사를 했다. 이날은 내가 식사당번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 캐리어에 담아왔던 콩자반과 양파 절임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은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기 전에 반찬들을 모아서 한 박스에 넣어 가지고 왔다고 했는데, 당시에 그 공지를 듣지 못했던 것이 여러 모로 아쉬웠다. 뷔페 형식으로 반찬들을 꺼내놓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라오스에 와서도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처음에는 접시 개수가 부족해서 걱정을 했지만, 밥이 일회용 도시락 용기에 담겨 있어 굳이 접시를 가져올 필요 없이 일회용 도시락 용기 뚜껑에 반찬을 담아서 먹으면 되었다. 게다가 식사가 끝난 뒤에는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이 식탁과 반찬통만 정리하면 되었기 때문에 시간도 줄이고 일손도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한국 음식이어서 그런지 다들 맛있게 식사를 했다. 식사하면서 학생들에게 이날의 배치표를 알려주었다. 나는 하루 종일 예진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힘들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힘들지에 대한 감이 없었다.

 

봉사지로 이동해서 전날 밤에 확인했던 위치에 IP공유기를 설치했다. 이날 나누어준 사랑나눔의사회 조끼를 입고 그 위에 SMA 패치를 달았다. 각자 배치된 부서로 이동하기 전에 내과 진료실에 모여서 기도하고 시작했다.

 

진료 첫날이었기 때문에 봉사 시작 전에 개막식이 있었다. 9시 넘어서 행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되었다. 각자 배정받은 위치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전날 얼굴을 확인했던 라오스인 영-라 통역과 함께 예진을 시작했다. 진료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방전의 문제가 있어서 EMR은 중단하고 수기로 전환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나마 수기와 병행했기 때문에 더 큰 혼잡은 빚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예진실은 처음에는 환자가 없어서 한산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환자가 갑자기 몰려와서 병원 안이 혼잡해졌다. 원래의 계획은 접수를 마친 환자들이 건강교육을 받으면서 대기하고 있다가 진료소에 자리가 생기면 몇 명씩 데려와서 예진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차트를 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번호 순서와 무관하게 진료실로 몰려들었다. 몇 명의 환자들만 진료실 안쪽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진료실 정문을 잠가 두었으나, 진료실 정문에 있는 창문에 유리가 없이 뚫려 있어서 환자들이 창문 안으로 손을 넣어서 잠긴 문을 열고 예진실로 들어왔다. 김형준 선생님과 한여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환자들에게서 차트를 걷어다가 번호 순서대로 이름을 불러주어서 임시적으로 대처했지만 혼잡은 피할 수 없었다.

 

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지치고 화가 났지만, 막상 예진을 하면서도 이름만 적혀 있는 차트를 보면서 울컥했다. 성별, 나이, 활력징후 등을 접수에서 물어보고 측정해서 기록해 주었더라면 환자가 몰려드는 속도가 조절되어 예진실 내의 혼잡이 덜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진을 하면서 내가 모든 환자에게 나이를 물어보고 성별을 적을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힘겨운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 식사를 하면서 잠시 쉬었다. 오전에 문제가 되어서 중단했던 EMR을 점심 식사 후 쉬는 시간에 고쳤다.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핸드폰에서 EMR에 접속할 수 있도록 수정했던 부분이었다.

 

점심 식사 이후에도 오전과 마찬가지로 예진을 했다. 직원 분들과 현지 인력의 도움을 받아 진료소 정문을 열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으니 출구로 사용하는 진료소 양 옆 문으로 환자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무질서함과 혼잡함에 화가 났지만 나중에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주변에 계시던 김형준 선생님과 한여울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나마 힘을 냈다. 사실 이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진료소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질서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이러한 현상 뒤에는 그들의 절실함과 필요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무질서하고 혼잡한 모습도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직 질서와 예절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데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 환자들이 착하고 순박하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진료가 늦어지는 상황에서 기다리라고 한 마디 하면 그 말에 따라서 아무 불평 없이 계속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 진료가 마칠 시간이 될 때까지 남아 있는 40명정도의 환자들에게는 내일 진료의 우선권을 주겠다고 하고 이름을 적고 별표 스티커를 주어 돌려보냈다. 차트는 병원에 보관했다. 예진을 마치고 나니 문제가 일단락 된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일부터 또 다시 예진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잘 된 점과 개선할 점을 적어야 하는 피드백 용지를 김형준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 도무지 잘 된 점을 적을 뻔뻔함이 없어 고민하면서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이동했다.

 

기분 탓인지 이날 준비된 저녁 식사는 너무나 맛이 없었다. 나는 채식을 하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었지만 고기반찬에 들어간 향신료가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고 했다. 그나마 나는 조미료 냄새는 조금 났지만 야채반찬이 있어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다해갈 즈음 계란오믈렛이 제공되었다. 어제 저녁에 이어 유진이가 내 왼쪽 자리에 앉았는데, 내가 계란오믈렛을 먹을 동안에는 구경만 하다가 내가 남은 계란오믈렛을 옆 테이블에 다 주려고 하니까 그제서야 오믈렛을 달라고 얘기해서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식사 중에 진하의 밥을 너무 많이 덜어 먹어서 핀잔을 듣기도 했다.

 

식사 후에 피드백을 하다 보니 오후에 EKG실에 있었던 진하와 지혁이형이 오후 내내 나 때문에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하는 EKG 기계에 과부하가 걸려서 멈춘 잠깐 동안에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고 했다. 지혁이형은 다리 통증을 주증상으로 호소한 할아버지를 예진 후에 심전도를 찍으러 보낸 것을 보고 울컥했다고 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을 지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날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어지럼증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기립성 저혈압으로 의심되는 증상이 있었는데,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언제 어지러운 증상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고 그냥 심전도를 찍으러 보냈기 때문에 심전도실에 과부하가 걸렸던 것이었다.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는 고령 환자인 경우에만 심전도를 찍기로 해서 EKG실의 과부하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예진실의 과부하 문제는 접수에서 소아 환자를 비롯한 몇몇 환자들의 경우 예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진료실로 환자들을 보내어 해결하기로 했다. 피드백이 마친 후에는 백과장님의 특강을 들으며 라오스 보건사업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식당에서의 일정이 마친 뒤에는 학생 숙소로 이동했다. 밤 9시 이전에 숙소에 도착하면 소그룹을 하고, 그 이후에 도착하면 소그룹을 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날 도착한 시각은 아슬아슬하게 9시가 지난 때였기 때문에 소그룹 대신에 단체로 예배를 드렸다. 말씀은 현정이 누나가 준비했는데,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환자를 만났을 때에,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기도를 해주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았다. 이날 내 능력의 한계를 만났을 때에 내가 대처한 모습이 생각났고, 내 모습과 현정이 누나의 모습이 대비되어 부끄러움과 함께 깨달음을 얻었다.

 

예배가 마친 이후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찬양을 드렸다. 강기훈 선생님, 조현정 선생님, 강하라 선생님들의 곡에 대한 해설과 윤석이의 기타 반주가 어우러져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노트북을 가져와서 배치표를 작성했고, 배치표를 다 작성한 후에는 함께 찬양을 했다.

 

방에 와서 다음날 진료에서 혼잡이 벌어지지 않을 방법을 강기훈 선생님과 윤석이와 함께 이야기 나누다가 어느 새 잠들었다. 다행히 이날은 침낭 안에서 잠들었다.

[동행 취재] 라오스에 ‘사랑묘목’을 심다

지난 8월 3일부터 연속 6회 시리즈로 출고된 재림마을 뉴스센터의 <[동행 취재] 라오스에 ‘사랑묘목’을 심다> 기사전문입니다.. 너무 길어 읽다 불쾌지수와 짜증 게이지가 폭발할 겁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마치 한 편의 알흠다운 꿈을 꾸고 돌아온 듯한 그날의 감동이 새록새록 행간에서 되살아나귈 진심 바라마지 않습니다..

끝으로 여러분의 노고와 헌신이 머잖아 라오스에 화려하게 꽃 피우길 기도합니다.. 사진과 동영상 등 기타 자료는 재림마을 뉴스센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쩔어주는 강남스똬일 올림 –

[동행 취재] 라오스에 ‘사랑묘목’을 심다
사랑나눔의사회 – SMA, 쿤 해외무료진료 현장에서

내륙일부 지방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되는 등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21일.

사랑나눔의사회(회장 임태우) 소속 의사와 재림교인 의.치.한의대생 모임인 SMA(SDA Medicalstudents Association / 학생대장 함윤석) 회원, 그리고 간호사와 협력자원봉사자 등 40여명의 대원은 라오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7박8일 동안 라오스 씨엥쾅도 쿤군 일대에서 ‘사랑나눔의료봉사 – 찾아가는 선생님’ 해외무료진료 활동을 펼치고 돌아왔다.

이번 행사는 특히 쿤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해외 의료팀의 무료진료인데다, 지난 4월 사랑나눔의사회가 라오스 보건국과 한국 민간단체로는 최초로 다년도 업무협약을 맺은 후 실시한 첫 봉사활동이어서 의미를 더했다.

별다른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구촌 이웃들의 아픔을 나누고, 국제의료협력 증진을 위해 진행된 이번 활동에는 총책임자 최대로 선생(사랑나눔의사회 교육이사 / 한림대 춘천 성심병원 혈액종양내과 조교수)을 비롯해 강기훈 선생(내과), 조현정 선생(산부인과), 강하라 선생(소아과), 조유미 선생(내과), 최해리 선생(치과), 금은철 선생(치과) 등 의료진이 참여했다. 특히 과거 KOICA 일원으로 라오스에서 3년간 봉사했던 박병원 선생(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심장내과)이 합류해 큰 힘이 됐다.

또 김영선, 조수현 간호사와 이수정 약사가 함께 해 환자들의 회복을 도왔으며, SMA 대학생과 교사, 학생으로 구성된 협력봉사자들이 이들을 조력했다. 이와 함께 사랑나눔의사회 라오스 사무소장 오경림 이사와 사무국 한여울 선생, 김형준 간사 등 현지 활동가들이 라오스 정부와의 코디네이션에 도움을 주었다.

봉사대는 이번 기간 동안 쿤 군립병원에서 실시한 무료진료와 산간오지마을 소수민족마을 방문진료, 이 닦기, 금주.금연 등 주민보건 및 위생교육, 라오스 병원과의 기술이전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여기에 현지에서 모자보건사업을 펼치고 있는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관계자를 강사로 초빙해 보건의료 국제개발에 관한 사례를 연구했으며, KOICA를 통한 해외의료 봉사경험을 공유하는 뜻 깊은 시간을 갖기도 했다.

라오스는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중앙부에 있는 내륙국. 1893년부터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어 지배를 받다 1949년 7월 독립했다. 1975년 공산혁명을 통해 사회주의국가가 되었다. 라오룸족(68%), 라오퉁족(22%), 몽족 및 야오족을 포함한 라오숭족(9%) 등 다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민 대부분이 불교(67%)나 샤머니즘을 숭상한다. 인구는 약 650만 명이며, 1인당GDP는 2,400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이들이 활동을 펼친 씨엥쾅도 쿤군은 라오스가 프랑스 지배를 받던 시절, 도청소재지였다. 라오스에 단 세 곳 뿐인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불교유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인구는 약 3만3000명. 77개의 촌락에 41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도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도로사정을 갖추고 있어 의료봉사활동을 펼치기에 좋은 곳이었다.

주민들은 평소 도청소재지인 폰사완시의 도립병원을 이용하는데, 기관지나 소화기 질환, 감기, 뇌막염 등을 많이 앓고 있다. 이번 기간 동안 진료를 받은 수혜자는 모두 1300명가량으로, 이중에는 분만환자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사랑나눔의사회와 SMA가 함께 펼친 라오스 무료진료 활동에 재림마을 뉴스센터가 동행했다. – 편집자 주 –

7월 21일 … ‘사바이디~ 라오스!’
오후 3시. 약속장소인 인천국제공항 D 카운터 앞에는 의약품과 의료장비, 생활용품 등을 담은 짐이 수북하게 쌓였다. 의약품만 대형 상자로 10박스를 훌쩍 넘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모두 라오스 의료봉사활동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수하물을 접수하는데 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연결편 지연으로 30분이나 늦게 출발한 비행기가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치솟았다. 얼마를 날았을까.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야경을 드러낸 어느 이름 모를 도시의 상공을 몇 번 지나자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의 왓타이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들려왔다.

약 5시간30분간의 비행을 마치고 라오스에 첫 발을 디뎠다. 사랑나눔의사회 현지 사무소장 오경림 이사와 한여울 간사 등 관계자들이 공항까지 마중 나와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이들의 환한 미소에 장시간의 비행에 찌든 피로가 싹 가시는 듯 했다.

대원들은 도착과 동시에 저마다 역할을 분담해 일사분란하게 짐을 나눠 트럭에 실었다. 민첩하게 행동했지만, 역시 짐의 양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공항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여장을 푼 이들은 쉴 틈도 없이 소그룹 별로 모여 앞으로 일주일간의 봉사활동 기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협의에 들어갔다. 각 파트와 개인별 역할 분담 등을 의논하는 대원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으로 흐르고 있었다. 라오스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7월 22일 … 라오스 보건국과의 MOU 체결 후 첫 진료봉사 ‘스타트’
동이 트자 일행은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의료봉사가 진행될 씨엥쾅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오전 10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씨엥쾅은 지표상 거리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중간에 험한 산맥이 자리하고 있어 육상으로 이동하기 힘들어 항공편을 선택했다. 쌍발프로펠러 비행기는 굉음을 내뿜으며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창밖으로는 족히 수천 미터는 되어 보임직한 험산이 마치 손 내밀면 닿을 듯 가까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내 끝도 모를 만큼 시원하게 펼쳐진 평야를 지나, 대지를 휘감느라 꼬불꼬불 허리가 휜 강줄기를 벗 삼는다. 갑작스런 기류의 변화로 심하게 흔들리는 기체에 몸을 맡긴 채 열대우림을 지나 약 30분 만에 씨엥쾅공항에 도착했다.

마치 시골 간이역을 연상시키는 작고 소박한 풍경의 공항에 내려 수속을 밟았다. 대중교통 등 마땅한 교통수단이 빈약한 현지 사정상 대원들은 트럭의 짐칸에 올라 한 시간 거리의 쿤군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진료소가 차려질 쿤 군립병원에는 휴일임에도 도 보건국 대외협력국장과 도 정부 대외관리국장 등이 병원장과 함께 나와 이들을 환영했다. 이번 기간 동안 이들의 ‘입’이 되어 무료진료를 도울 통역자도 자리를 함께했다.

“사바이디(안녕하세요?)”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이마에 가볍게 대며 미소를 짓는 이들의 푸근한 인사에 진한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쿤 군립병원은 이 지역의 중심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본관을 중심으로 2개의 부속 건물이 날개처럼 양 쪽에 자리 잡은 아담하고 조용한 시설이었다. 하지만 열악한 의료환경과 낙후한 기술로 주민들에게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부랴부랴 쌀국수로 대충 요기를 한 일행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각 파트별로 나뉘어 진료 준비에 들어갔다. 접수, 내과, 산부인과, 치과, 물리치료, 심전도, 약국, 건강교육 등 스테이션별로 장소를 정하고 장비를 설치했다.

인력을 배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다. 병실과 침상을 깨끗이 청소하고, 책상의 위치를 바꾸고, 준비해 온 장비와 치료기구를 설치했다.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던 병원은 완벽하진 않아도 금세 그럴 듯한 진료소로 바뀌었다. 이제 내일이면 그동안 아파도 변변히 치료조차 받지 못했던 환자들의 발걸음으로 붐빌 것이었다. 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 한 켠에 나눔의 행복과 기쁨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사이 라오인들도 천막을 치고, 액정과 스크린을 설치하는 등 일손을 보탰다. 멀리 한국에서 온 봉사대를 향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듯 했다. 중량제한 때문에 비행기에 싣지 못하고 새벽녘 비엔티안에서 트럭으로 실려 보냈던 짐이 도착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오후 6시를 훌쩍 넘겨서야 모든 세팅과 테스트가 겨우 끝났다. 하지만 장비가 자리를 잡았다고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때부터는 실제로 환자를 맞이할 동선을 체크하고, 진료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시간이다.

환자와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통역 시스템도 점검한다. 환자의 증상과 상태를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라오어나 몽족어로 통역한다. 각 의과별로 자주 사용하는 몇 가지 단어와 문장은 아예 암기했다.

사랑나눔의사회의 이번 활동은 주로 무료진료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었다. 이는 현지의 약값 때문이다. 라오스에서는 환자가 의사의 진료를 받는 것은 무료지만, 치료에 필요한 각종 물품이나 약품구입은 온전히 본인 부담이다.

심지어 수혈 처방을 받은 응급환자라도 보호자가 혈액은행에 가서 혈액을 직접 사와야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극빈자 카드를 갖고 있으면 약값이 면제되긴 하지만, 그럴 경우 ‘좋은 약’을 주지 않을까 싶어 수혜자여도 카드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때문에 무료진료를 통해 양질의 약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싶은 것이 사랑나눔의사회의 마음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마을주민 몇몇이 신기한 듯 창문에 기대 이들의 모습을 조심스레 훔쳐봤다. 간혹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말없이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마치 ‘내일 만나요’라고 인사하는 듯했다.

대원들의 티셔츠는 어느새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시계바늘은 오후 8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서로 돕고 힘을 모은 결과가 서서히 체계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밤이 지나면 본격적인 봉사활동이 시작될 것이었다. 뭐라 말은 하지 않지만, 다들 긴장과 기대가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7월 23일 … ‘라오스 국민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길’
오전 8시. 드디어 무료진료 첫 날 아침의 커튼이 열렸다. 본격적인 진료에 앞서 쿤군 군수와 도 보건국 대표 등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랑나눔의사회 무료진료단을 환영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들은 한국에서 전문의료인이 사랑의 의술을 펼치기 위해 라오스까지 와 준 것에 감동하며 각별한 고마움을 표했다.

쿤 군립병원 운동장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의 발걸음으로 북적였다. 군청에서 일찌감치 안내방송을 하고, 광고가 잘 된 덕에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게 중 먼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전날 출발해 친척집에서 자고 새벽같이 이곳을 찾은 이도 있었다. 라오족뿐 아니라, 고산지대에 사는 몽족인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며칠 전 나무에서 놀다 떨어져 팔이 부러진 아이,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고열이 올라 칭얼대는 손자를 업고 온 할머니, 잔뜩 찌푸린 날씨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멋을 한껏 낸 중년의 신사와 두 손을 꼭 잡고 나온 금슬 좋은 노부부 등 모두 반갑고 즐거운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네 아주머니의 얼굴에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환자들로 준비해 놓은 의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꽉 들어찼다.

오전 9시 시작된 오전진료는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로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접수창구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붐볐다. 진행요원이 무질서한 군중을 정리하느라 한동안 진땀을 빼야했다.

올해는 특히 해외의료봉사 활동 처음으로 전자의무기록(EMR: Electronic Medical Record) 시스템을 시도했다. 그러나 현지 사정으로 오전 11시경 부득이하게 종료해야 했다. 불안정한 통신망 탓에 컴퓨터에 자꾸 버그가 생겼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이른 종료에 한국에서부터 며칠을 고생해 시스템을 구축한 남동우 대원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소아과 병동 … 엄마 등에 업혀 온 실명아동 ‘안타까움만…’
소아과는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풍선아트로 장식됐다. 삭막했던 병실이 누구나 좋아할 만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노란색, 녹색, 분홍색 등 형형색색의 풍선은 강아지, 나비, 꽃 등 아기자기하고 앙증맞은 캐릭터로 변해 환자를 맞이했다. 아이들의 천진함과 잘 어울려 편안해 보였다.

오전 11시. 한 아이가 엄마의 등에 업혀 헐레벌떡 소아과 병동으로 뛰어 들어왔다. 얼마 전 칼로 왼쪽 눈을 찔렸는데, 초기치료에 실패해 눈동자에 종양이 생긴 것이다. 카콤이라는 이름을 가진 올해 네 살의 이 소년은 계속 엄마의 치마가랑이를 붙잡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부풀어 오른 종양에 아이는 눈도 제대로 뜨고 감을 수 없었다. 언뜻 봐도 당장 수술이 필요해 보였다.

순간, 소아과 담당 강하라 선생의 낯빛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기서는 단순히 안약만 처방할 수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큰 병원으로 가 전문수술을 받아야하는 긴급한 상황이었다.

강 선생은 “이미 한 쪽 눈은 실명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하며 “만약 종양이 계속 부풀어 오른다면 평생 저렇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종양이 더 커지거나 안구 내부로 파고들면 더 악화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게다가 감염이 번져 바이러스가 뇌로 침입한다면 치명적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수술을 권유했지만, 아이 엄마는 “돈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에게는 급한 대로 눈의 붓기가 계속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약이 처방됐다. 이것이 근본적 치료가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강하라 선생의 눈가에 더 이상 어떤 조치도 취해줄 수 없다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교차해 지났다.

산부인과 병동 … 갑자기 복도서 쓰러진 산모에 ‘화들짝’
같은 시각, 갑자기 산부인과 병동이 부산해졌다. 친정아버지의 진료를 도우러왔던 한 임산부가 복도에서 쓰러진 것이다. 응급상황에 각 실에 있던 의료진이 모두 급박하게 모여들었다. 재빨리 혈압을 재고, 동공을 확인했다.

라오어가 가능한 박병원 선생이 환자와 대화를 시도하며 의식을 체크했다. 다행히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였다. 의료진은 환자를 다급하게 병실로 옮겨 치료를 시작했다. 검진 결과 큰 이상은 없었다. 임신빈혈 증상이었다. 수액을 투여하고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환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부인과 조현정 선생은 “혹시 태아에게 영향이 있을지 모르니 초음파를 찍어보자”며 환자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별일 아니다. 부끄럽게 이러지 말라”며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을 아버지와 함께 걸으며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이 걱정스러운 듯, 조현정 선생은 자신의 눈가에서 이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진료소 현관을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진료 후에도 현지 NGO 관계자 초청 특강열기로 ‘후끈’
전쟁터 같던 첫날 진료는 오후 6시가 가까워져서야 마무리됐다. 각 병실을 정리하고 청소한 후 스테이션별로 모여 그날의 활동 피드백을 시작했다. 좋았던 점, 부족했던 점, 평가와 개선사항 등 하루 활동에 대한 반성과 의견을 교환했다. 더 효율적인 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저녁식사와 함께 현지에서 모자보건사업을 펼치는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백주왕 과장의 특강이 마련됐다. 백 과장은 라오스에서 진행 중인 모자보건사업의 현황과 특징, 향후 전망과 계획, 한국과의 연계사업 등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오후 내내 진료현장에 머물며 이들의 활동을 지켜본 백 과장은 “그동안 많은 봉사단을 만나봤지만, 의료봉사대는 처음”이라며 “라오스 국민들이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여러분이 큰 힘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분주하게 활동하며 움직인 탓에 피곤할 법도 한데, 대원들의 눈빛은 더욱 반짝였다. 마치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되새기는 듯 했다.

7월 24일 … ‘산간오지의 보금자리’ 몽족마을 이동진료
쿤 군병원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몽족마을로 이동진료가 있는 날이다. 내과 전문의 강기훈 선생과 의대생 정진하 양, 이수정 약사, 통역 등 스태프들이 도 보건국 소속 공무원의 안내로 이동진료에 나섰다.

언뜻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첩첩산중 고산지대의 가파른 외길을 따라가야 이들의 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도로포장이 되어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곧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산간오지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사는 몽족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몽족은 중국 한족의 주류역사 시작 이전부터 중국에 거주하던 민족. 강한 씨족단위의 유대감 속에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현재 라오스 북부지역을 비롯해 중국,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 흩어져 있다. 이 마을에는 26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마을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단의 주민과 관계자들이 차에서 내리는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옆에 소총으로 무장한 이들이 서 있어 깜짝 놀랐다. 마을책임자인 이들에게는 실탄과 총이 지급된다고 한다. 산짐승으로부터 가족과 주민을 보호하고, 혹시 모를 반군과의 교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임시진료소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학교에 차려졌다. 비가 내려 질퍽해진 비탈길을 미끄러지며 약통과 장비를 들고 오르느라 진료도 시작하기 전 진땀을 뺐다.

시간이 되자 마을주민들이 여기저기에서 몰려들었다. 삽시간에 족히 100명은 되어 보임직한 사람이 좁은 교실에 모였다. 진료는 영어와 라오스어, 몽족어가 교차하는 3중 통역을 거쳐야 겨우 진행될 수 있었다.

환자들은 주로 위궤양 등 소화기 장애와 갑상선염, 폐렴 증세 등을 앓고 있었다. 주로 화전을 경작하는 등 평생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보니 근골격계 질환의 통증을 호소하는 이도 많았다. 강기훈 선생의 꼼꼼하고 친절한 진료가 이들의 마음까지 치료해 주는 듯 했다.

옆 교실에서는 건강교육이 열렸다. 돼지, 소, 닭 등 가축과 함께 생활하는 이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기생충예방 등 위생교육 위주로 진행됐다. 주거문화개선 등 주민 생활환경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지만 아직 이들에겐 요원한 이야기다.

정부와 NGO에서 위생교육을 하고 있다지만, 이들의 근본적인 생활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건강교육에 참여한 주민들의 손에는 구충제가 하나씩 쥐어졌다. 준비해 간 비타민영양제는 아이들에게 큰 선물이자 기쁨이 되었다. 양은 얼마 되지 않아도 그 새콤하고 달콤한 맛은 아이들의 가슴에 추억이 되어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었다.

우기의 라오스 산간지역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햇살이 반짝이며 쾌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다가도, 갑자기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곤 했다. 그러나 몽족인들은 비가 온다며 부산스럽게 호들갑을 떨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고 넉넉한 미소로 낯선 풍경을 대하는 이방인을 지켜볼 뿐이었다.

오전 11시가 넘어갈 즈음. 한 아이가 울면서 엄마 품에 안겨 진료실에 들어왔다. 이제 겨우 갓 두 살을 넘겼다는 아이는 오른쪽 허벅지가 온통 곪아 있었다. 진피와 피하 조직에 나타나는 급성 화농성 염증인 봉와직염이었다. 언뜻 육안으로 보더라도 금방 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강기훈 선생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상처가 너무 깊어 즉시 수술이 필요해 보였다. 그 상태로 두었다간 패혈증으로 발전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만약 뼈까지 침투한다면 골수염이 될 수도 있다. 설명을 듣던 엄마는 조심스런 표정으로 보채는 아이의 입에 젖을 물려주었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곧바로 쿤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아이를 후송하기 위해서다. 쿤 병원에서는 주사제라도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만약 쿤 병원에서 치료가 안된다면 더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숨 쉬지 않는 신생아 … ‘아이를 살려라!’
같은 시각, 쿤 병원에 한 산모가 들어섰다. 출산이 임박했는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현지 의료진에 대한 기술이전과 협력사업 관계로 산부인과 조현정 선생이 자리를 비운 터였다. 병원 관계자도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김영선 간호사가 부리나케 응급실로 향했다. 20대의 산모는 초산이라 그런지 더 힘겨워하는 듯 했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산모는 보호자도 없이 진통을 거듭하며 몸부림 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산모가 아이를 분만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아이가 숨을 쉬지 않았다. 떠나갈 듯 울어야 할 울음도 터지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소아과 강하라 선생이 뛰어 들어갔다.

아이는 그때까지도 숨을 쉬지 않았다. 강 선생은 순간, 사산아인줄 알았다. 그와 김영선 간호사는 곧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산소공급이 급박한 상황이었다. 자칫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다간 소중한 생명을 담보할 수 없었다.

산소호흡기로 산소를 정상적으로 공급해야 했지만, 병원에는 그런 장비가 전혀 갖추어있지 않았다. 마침 강하라 선생과 김영선 간호사의 시야에 종이컵이 들어왔다. 둘은 종이컵을 아이의 입에 대고 산소호흡기를 대신했다. 곧 거짓말처럼 아이가 숨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김 간호사는 그때부터 산모와 아이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아이가 자칫 몸부림을 치면 그나마 응급조치로 붙여놓은 종이컵이 떨어질 게 뻔했다. 산모와 아이를 후송하기 위해 폰사완시에 위치한 도립병원에서 출발한 앰뷸런스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 이들을 떠나보내는 봉사대원들의 마음이 걱정스런 눈빛만큼이나 무거워 보였다. 앰뷸런스가 토해내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묻혀 시간은 또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당장 수술이 필요합니다” … “그건 가족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오후 2시. 봉와직염으로 치료가 필요했던 몽족마을의 아이를 태운 자동차가 쿤 병원 주차장에 들어섰다. 곧바로 소아과 강하라 선생에게 향했다.

“언제부터 이랬나요?”

“한 달 전쯤부터요. 갑자기 종양이 커졌어요. 이유는 저희도 모르겠어요”

“그동안 치료는 안 받았나요?”

“병원에서 두 번이나 주사를 맞긴 했는데, 별다른 효과가 없었어요. 오히려 증상이 더 심해졌어요”

아이의 엄마와 대화를 주고받던 강하라 선생이 고민에 빠졌다. 아이는 장기간의 입원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적어도 열흘 이상 항생제주사를 맞으며,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번 해외진료에서는 외과적 수술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더 답답했다.

도립병원이나 큰 병원으로 가서 계속 주사를 맞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자, 더 이상 병원진료는 어렵다며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보건당국 공무원도 “이 문제는 가족이 판단하고 선택할 문제”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강 선생이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현재의 여건상 항생제주사를 놓아주는 것 밖에 달리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분의 약을 처방해 주었지만, 이마저도 완치를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아이는 이번 봉사기간 동안 계속 진료소를 방문해 치료를 받기로 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현지 의료진에 대한 기술이전 세미나 관계로 자리를 비웠던 조현정 선생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를 기다리는 또 한 명의 환자가 있었다. 바로 가족과 함께 진료소를 찾은 산모였다. 역시 초산이라는 이 산모는 그러나 생각보다 출산이 더뎠다.

이날 밤 조현정 선생과 이수정 약사, SMA 대원 구원 양 등 몇몇 스태프는 출산을 기다리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라오스 의료봉사에서 ‘당직근무’를 설 줄은 몰랐다며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조 선생의 입가에 싫지 않은 미소가 담겨 있었다.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언제나 말씀과 기도
이날 밤 대원들의 숙소. 하루일과를 마무리 짓는 순서는 언제나 소그룹활동이다. 찬양과 기도, 말씀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되짚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모았다. 특히 의료계 대선배인 강기훈 선생은 ‘젊은’ 후배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관계, 사랑의 본질을 성경과 접목해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특강을 마련해 도움을 주었다.

강 선생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며 봉사와 건강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 잘 아신다. 결국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의료사역을 위해 어떠한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지 묵상하는 대원들의 표정과 뜨거운 후배 사랑을 보여준 강기훈 선생의 열정이 겹치며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치열했던 봉사대의 하루는 그렇게 또 한 번의 밤을 맞고 있었다.

7월 25일 … ‘울고’ ‘웃고’ ‘빼고’ 치과 진료실 풍경
이날 아침은 아기의 울음소리로 시작됐다. 밤새 진통하던 산모가 새벽 4시경 3.5Kg의 건강한 사내아이를 순산했다. 산모와 아이아빠는 물론, 곁에서 출산을 지킨 할머니는 첫 아이의 출생을 무척 기뻐했다. 봉사대원들도 병실을 직접 찾아와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했다.

발길을 치과 진료실로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에 걸린 스탈린과 레닌의 사진액자가 눈에 띄었다.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쿤 병원에는 치과의사가 한 명뿐이다. 진료의자는 비엔티안에 있는 병원에서 쓰던 것을 지원받은 것이다. 도립병원에도 치과의자가 한 대뿐인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시설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병원을 찾는 환자의 질병종류와 열악한 도로사정을 감안하면 이곳 주민들에게 치과진료는 어쩌다 만나게 되는 봉사팀을 기다리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탁자와 책상을 붙여 만든 5개의 진료의자엔 환자가 빼곡히 들어 차있었다. 주로 스케일링이나 발치 환자들이다. 평소 치아관리가 잘되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식습관도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어둡고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습기까지 높아 연신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대원들은 2인1조가 되어 손발을 맞췄다. 찰떡호흡이다. 한쪽에서는 기구를 소독하는 손길이 바쁘게 오갔다.

조용하던 진료실에 갑자기 ‘전쟁’이 벌어졌다. 치과 기구를 처음 본 한 아이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치료에 협조를 하지 않아서다. 발버둥치는 아이는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금은철 선생이 급하게 배운 서툰 라오어로 아이를 어르고 달랬지만, 녀석은 발을 동동 구르며 저항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뒷짐을 지고 조용히 지켜보던 아이의 아빠가 의사선생님 보기 미안했던지 녀석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냅다 호통을 쳤다. 그제야 아이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아이의 눈빛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 ‘공포’가 어떤 건지 잘 알기에 아이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친구 따라 호기심에 진료소에 온 동네꼬마는 치과진료소의 모습에 겁이 덜컥 났다. 처음 보는 신기한 의료장비와 집게, 핀셋 등이 무시무시한 포스를 드러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치~치~’ 거리며 하얀 연기를 내뿜는 이름 모를 장비도 무섭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럴 땐 빨리 발길을 돌려 집으로 줄행랑치는 것이 살 길 같아 보였다.

‘아뿔싸!’

먼저 진료소에 들어간 친구가 울음을 터트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문 밖으로 스쳤다. 모른 채 하고 도망가려니 영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창가에 턱을 괴고 걱정스런 모습으로 지켜보던 아이의 마음에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드는 듯 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이름이 불리고 난 후였다.

간단한 검사 후 아이는 썩은 이를 뽑았다. 하필 정중앙 앞니다. 예쁜 의사누나에게 용감한 사나이로 보이려 ‘라이벌’인 친구 녀석보다 소리도 지르지 않고, 아우성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은 찔끔 났다. 의사누나가 “잘 참았다”면서 등을 토닥여줬다. 이쯤이면 판정승이다.

하지만 비주얼이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거울에 비쳐보니 앞니가 빠진 자신의 모습이 영 볼품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어색하고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뽑지 않았으면 옆의 이까지 함께 썩을 뻔 했다는 의사누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료소를 나서는 아이의 손에 의사누나는 빠진 이를 ‘기념품’으로 쥐어주었다. 아이는 친구 손을 붙잡고 천진하게 웃으며 비 내리는 거리를 냅다 가로질러 지났다. 서로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까르르 넘어가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길 건너까지 청명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치과 의사누나의 입가에도 빙그레 웃음꽃이 피었다.

나통마을 이동진료 … 의료기술 전수세미나 ‘바쁜 하루’
이날 오전에는 병원에서 약 30분가량 떨어져 있는 나통마을로 방문진료를 떠났다. 라오족이 사는 산간마을이다. 강하라 선생과 김영선 간호사, 전주향 약사 등이 동행했다. 빗물을 잔뜩 먹은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한참 달리다보니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진료는 이 마을의 보건소에서 진행됐다. 전날 몽족마을보다 훨씬 환경이 좋았다. 약국이 분리되어 있고, 진료실도 훨씬 쾌적했다. 주민들의 모습도 꽤 단정해 보였다. 이 마을에서는 이날 하루 80여명의 환자가 치료를 받았다. 이들 역시 대부분 소화기 질환이나 피부염을 앓고 있었다.

전주향 약사는 틈틈이 아이들을 위해 올바른 손 씻기 법을 알려주었다. 처음 접하는 내용이라 그런지 아이들의 표정이 신기하기도 하고, 쑥스러운 듯 보이기도 했다.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드는 환자들을 진료하느라 대원들의 유니폼은 금세 땀으로 뒤범벅됐다. 하지만 이들은 잔잔한 눈웃음으로 환자를 맞이했다. 주민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진 것은 물론이다.

오후에는 혈액종양 내과 전문의인 최대로 선생이 폰사완시에 위치한 씨엥쾅 도립병원을 찾아 의료기술 전수세미나를 진행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혈액과 세포, 빈혈, 혈액검사 방법 등에 대해 강의했다. 사랑나눔의사회 봉사팀은 이번 기간 동안 심장초음파, 복부초음파, 산부인과초음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도 보건국의 협력을 얻어 진행된 이 세미나는 이번 활동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지역주민의 건강증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현지 의료진과 펼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형태의 협력사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강의를 듣기 위해 도립병원 직원뿐 아니라, 씨엥쾅에서 자동차로 5시간 거리에 떨어진 목마이에서도 의사와 의료진이 참석하는 등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최 선생의 강의는 당초 약속된 시간을 한참 지나도록 계속됐다.

한밤중 대원들이 모두 골방에 모인 까닭은?
이날 밤. 대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사연은 이랬다. 이날 오전 께오깐마을 이동진료 현장에 한 사내아이가 부모와 함께 찾아왔다. 올해 네 살 된 이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목에 혹이 생겼다. 작년에 수술을 했지만, 종양이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았는지, 혹은 계속 자랐고 이제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종양이 악성인지 여부는 CT촬영을 해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혹이 호흡기를 계속 누르고 있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가래가 제때 배출되지 않다보니 폐렴증상까지 겹쳐 하루빨리 장기적인 입원치료가 필요했다.

쿤 병원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베엔티안이나 폰사완의 대형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후, 전문의로부터 치료를 받아야했다. 그러나 아이의 부모는 돈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를 이대로 두었다간 생명이 위급한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부모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아이의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대원들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자발적으로 수술비용을 모으기로 했다. 어느 누구의 요청도 없었지만,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 헌신하기로 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500달러의 자금이 모아졌다. 이 정도면 급한 대로 수술과 입원치료 비용은 될 것 같았다. 이튿날, 아이는 부모와 함께 폰사완의 도립병원으로 떠났다. 대원들의 의료봉사가 무료진료뿐 아니라, 실제로 한 생명을 살리는 손이 된 순간이었다. 이처럼 이번 활동은 아프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마음 한 자락을 나눠주는 따뜻한 현장이 되기도 했다.

7월 26일 … 한 명의 환자라도 더 … ‘마지막 땀방울까지’
어느덧 진료 마지막 날 아침햇살이 떠올랐다. 이제 겨우 적응이 되고, 손발이 맞는 것 같아 진료 속도도 한결 빨라졌는데, 벌써 마지막이라니 대원들의 표정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아침부터 한 병실에서 어린아이의 떠나갈듯 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신생아의 그것은 아니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외침이었다. 엊그제 몽족마을에서 봉와직염으로 후송되었던 아이를 치료하는 소리였다. 그나마 지난 이틀사이 주사도 맞고 약을 먹어 많이 나아진 상태였지만, 이대로 집으로 보냈다간 재발이 불 보듯 뻔했다.

조현정 선생이 고름을 직접 손으로 짜내기 시작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찢어질 듯 더 커졌다. 고름과 피가 뒤섞여 여린 피부를 타고 쉼 없이 흘러내렸다.

조 선생의 장갑에 피와 고름이 범벅됐다. 짜내지 않아도 피와 진물이 수돗물처럼 터져 나왔다. 체내에 고름격막이 여러 개 형성되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아이는 발버둥 치며 자지러질 듯 울음을 토해냈다.

“아가. 아프지? 미안해 조금만 참아. 곧 나을 거야…”

조 선생은 울부짖는 아이를 어르며 치료를 계속했다. 피와 고름을 닦아낸 수십 개의 거즈가 어느새 휴지통으로 가득 찼다. 울다 지친 아이는 눈물마저 말라 버린 듯 했다. 머리는 온통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일단 손으로 격막의 고름을 빼낸 후 체내에 남아 있는 잔량을 제거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얇은 호스를 삽입했다. 주사기로 남아 있는 고름을 빼내면 하루나 이틀 후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붓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약 30분간의 치료는 주사제와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끝났다. 땀과 눈물에 젖은 아이머리를 어루만지는 부모의 눈가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교차했다. 조현정 선생도 그제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아침시간이었지만, 그사이 환자는 평소보다 두 배나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봉사기간 중 가장 바빴던 약국 … “이 약 드시고 꼭 건강해지세요!”
무료진료 기간 중 가장 바쁜 곳 중 한 곳은 약국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처방전을 받은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기도 했다. 의과와 치과 환자 모두가 몰리다보니 숨 돌릴 틈도 없었다. 게다가 처음 얼마간은 모자란 일손 때문에 골치를 썩기도 했다. 특히 통역이 없어 이수정 약사는 홀로 고군분투해야 했다.

진료가 시작되기 전부터 자주 쓰는 처방표현과 용법, 용량을 라오어로 정리해 대처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약 종류가 많아지거나 설명이 복잡해지면 그의 입에서 헛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마치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지…’ 하는 걱정 같았다.

그 중 백미는 설사증상과 안과질환을 함께 안고 온 어린아이. 먼저 분말로 된 소화약을 뜯어 시럽병에 넣고, 정량의 물과 용해시키는 법을 직접 시범 보였다. 이를 하루에 몇 번씩,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 라오어 설명을 덧붙인다.

여기에 안질환까지 있어 안약을 넣는 방법도 알려주어야 했다. 2시간에 한 번씩 안약을 넣으라는 말을 손짓발짓으로 건네고, 알약은 식후 30분 후 하나씩 사흘 동안 먹이라고 이야기한다. 다행히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했는지 아기아빠는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가 되자 이 약사의 목이 쉬어버렸다.

한쪽에서는 처방전에 따라 약을 조제하는 손놀림이 바쁘게 오갔다. 환자들이 밀려들면서 잠시 앉아 쉴 짬도 나지 않아보였다. 처방전을 손에 든 환자들은 밀려드는데 투약설명이 길어지다 보니 대기시간도 계속 지체되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이 급해지면 안 된다. 괜히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환자가 자칫 약을 오용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꼼꼼하고 자세하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올바른 방법이라는 걸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컵짜이 … 여러분의 사랑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밀물처럼 몰려들던 환자들의 발걸음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드디어 무료진료가 마무리됐다. 군 보건당국의 협조로 큰 혼잡 없이 진료활동을 접을 수 있었다. 현지 공무원들은 지역주민의 기대만큼이나 대원들이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시종 적극 협력했다.

한 시간 후, 병원 인근의 마을회관에서 이들의 활동을 기념하는 환송행사가 열렸다. 쿤군과 병원 측이 주최한 모임이었다. 마을주민 100여명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탁자에는 화려한 꽃장식과 정성껏 마련한 다과가 준비되었다.

이 지역 행정책임자는 “지난 나흘 동안 여러분이 보여준 큰 헌신과 사랑에 감사한다”고 인사하며 “여러분의 도움으로 우리 주민들이 건강을 지킬 수 있었다. 우리의 만남이 앞으로도 계속 되길 바란다”고 인사했다.

단장 최대로 선생은 “만약 여러분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준비한 약이나 의료장비, 인력으로는 이 모든 프로그램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이번 무료진료는 여러분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최대로 단장은 “우리는 앞으로 3년간 시엥쾅 도내 3개 군에서 무료진료를 계속할 계획”이라고 소개하며 “지금까지는 단기봉사활동이었지만, 향후에는 당뇨병이나 고혈압 등 장기치료에 필요한 기술과 건강관리법을 전수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저기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쿤군 당국은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소중한 고마움을 담아 감사장을 전달했다. 굵은 땀방울을 감추던 대원들의 표정에서 뿌듯한 보람과 서로를 향한 대견함이 읽혔다. 대원과 주민들은 해가 서산마루를 넘어가도록 서로의 안녕과 재회를 기원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이번 쿤 지역 무료진료를 통해 의과계열 850명, 치과계열 300명, 마을 이동진료 150명 등 모두 1300여명의 주민이 도움을 받았다. 당초 목표인원을 훌쩍 넘는 수치였다. 또 씨엥쾅 도립병원에서 진행된 의료기술 전수 세미나에는 24명의 현지 의료진이 참석해 선진의료기술을 지원받았다.

이번 활동의 의미는 무엇보다 그 대상이 수혜자이건 봉사자이건 모든 과정에 참여한 이들이 서로 존경하고 행복을 나누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앞으로 의료현장에 나서야 할 ‘예비 의사’ 들에게 나누는 삶의 가치와 소중함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도록 산교육의 장이 되기도 했다.

봉사는 물질이나 육체뿐 아니라 마음의 끝자락까지 모두 비우며 헌신하는 것이란 교훈과 진정한 행복의 방법을 터득하는 시간이었다. 활동을 마친 대원들은 오히려 자신이 나눌 수 있는 사랑의 크기가 이것 밖에 되지 않는 점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 2012년 라오스의 여름은 한낮 태양보다 더 뜨겁고 강렬했던 이들의 사랑과 땀방울을 잊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연일 쉼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지구촌 이웃에게 사랑의 묘목을 심고, 나눔의 밀알을 파종한 45명의 ‘사랑나눔의사회 – 찾아가는 선생님’ 무료진료팀 대원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길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취재수첩을 적셨던 땀방울도 그제야 말라들었다.

후기 #2. 22일(일)

아침에 지혁이 형이 깨워서 일어났다. 다행히 샤워실들이 비어 있어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캐리어에 담아온 반찬에서 양파즙이 새어 나와 내가 챙겨온 유일한 수건을 적신 상태여서 양파즙에 닿지 않은 부분으로만 몸을 닦았다. 방에 돌아와서야 전날 밤에 호텔에서 개인별로 나누어 준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 7시에 아침 예배를 드리는 줄 알았는데, 식사를 먼저 한 이후에 아침 예배를 드리는 일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토스트와 과일 등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전날 밤에는 칼이 없어서 먹지 못했던 망고를 이날 아침 식사 후에 먹게 되었는데 다들 덜 익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대했던 것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아침 식사가 끝날 때까지 석형이와 서준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에 현지 라오스 목사님을 통한 간단한 예배를 드렸다. 사실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떤 기도를 하시는지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햇볕은 강하고, 내가 앉은 자리는 목사님과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영어를 잘 못하고, 목사님도 영어를 잘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듣게 된 사실은 목사님이 처음에는 영어로 기도를 시작하셨지만 나중에는 라오어로 기도하셨다는 것이었다. 영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전날 밤에 찬타파냐 호텔에서 묵으셨던 선생님들께서 예배가 끝날 즈음에 우리 숙소로 찾아오셔서 합류하셨다.


예배 후에는 짐을 챙겨서 차 두 대에 나누어 믹사이 파라다이스 호텔을 떠났다. 전날 밤에 312호에서 과일을 먹었던 사람들은 호텔에서 빌려준 수건 위에 과일을 올려두고 먹어서 수건 하나를 못 쓰게 만들었기 때문에 배상을 하기도 했다.


봉사지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부쳤다. 짐이 많고 무거웠지만 항공사 측에서 많이 협조해 주어서 어렵지 않게 짐을 보냈다. 짐을 부치는 중에 남는 시간에 심카드를 사러 공항 내 매점에 갔는데, 공항이라서 특별 가격을 받는다며 원래 가격의 5배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박병원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바가지를 쓸 뻔했다. 결국 심카드는 한여울 선생님께 부탁드려서 나중에 현지 시내에서 구입하기로 했다.


짐을 부치고 출발 수속을 밟은 이후에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이수정 선생님께서 나와 상훈이, 주향이 누나 등을 부르셨다. 무슨 일로 불려갔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단체짐을 맡게 된 것이었다. 나는 E1~5번 박스를 맡았는데, 나머지 박스들은 트럭으로 봉사지까지 이동하고, 비행기에는 E1, E3 박스만 실리게 된다고 했다.


출발 시각이 되어 비행기까지 걸어서 이동하면서 본 비행기의 모습은 아담하고 신기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양쪽 날개에 하나씩 달려 있는 커다란 프로펠러는 이것이 국내선 비행기임을 알게 해 주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약간 시끄럽고 덜컹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문제 없이 금방 비행이 끝났다.


씨엥쾅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에 의외로 덥지 않은 날씨와 습하지 않은 공기 때문에 놀랐다. 더불어 봉사대 기간 동안 날씨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버스터미널을 연상시키는 공항의 작은 규모였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공항까지 걸어가는 자갈밭도 낯설었고, 부쳤던 짐을 비행기에서 내려 리어카에 싣고 공항까지 나르는 모습도 낯설게 느껴졌다.


공항에서 부쳤던 짐을 찾고 수속을 마친 후에 트럭 2대에 나누어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내 옆에는 진하와 은섭이형이 있었는데, 다들 앉아서 가지는 못했지만 라오스의 자연 풍경과 의외로 잘 정비된 길에 만족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다만 우리가 탄 트럭은 무게 때문인지는 몰라도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트럭들에 추월 당해 앞차의 매연을 맡아야 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1시간 정도 이동하여 쿤 지역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는데, 처음에는 낡은 학교 건물을 보고 실망했지만 실제 숙소는 학교 건물 뒤에 있는 기숙사 건물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는 각 층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는 2층 건물이었고, 처음에는 남학생이 1층, 여학생이 2층을 쓰기로 했지만 침대가 주로 1층에 있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을 배려해서 층을 맞바꾸어 쓰기로 했다. 덕분에 2층에 있던 침대를 1층으로 줄에 달아 내리는 진풍경을 보기도 했다.


선생님들 중 몇 분께서는 학생들과 같은 숙소를 쓰시기로 하셨는데, 최대로 선생님, 박병원 선생님, 현지인 통역 2명이 2층 오른쪽 끝 방을 쓰시고, 강기훈 선생님과 강하라 선생님, 나머지 남학생들은 4개의 방을 쓰기로 했다. 각 방마다 3명씩 사용하면 되는 상태였는데 강하라 선생님과 윤석이는 잠을 잘 때의 생리적인 이유로 인해 오른쪽 2번째 방에 배정되었다. 나는 강기훈 선생님과 함께 오른쪽 3번째 방을 쓰기로 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2개의 방에 4명씩 모여서 자기로 했다.


그런데 캐리어를 끌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 보니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신축 기숙사라고 해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방 바닥에도 아무것도 없어서 가져온 침낭을 깔고 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콘센트가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방마다 큰 생수통 하나와 휴지, 인원수만큼 컵과 돗자리가 제공되어서 도움이 되었다.


우선은 숙소에 캐리어를 가져다 두고 필요한 짐만 챙겨서 점심식사를 하러 숙소를 떠났다. 도중에 선생님 숙소에 잠시 들렀다가 점심 식사를 하러 한 식당으로 이동했다. 점심 식사는 채식주의자끼리 모여서 먹었다. 메뉴는 고기국물을 사용하지 않은 국수였는데 맛은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했다. 음식은 간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김영선 선생님은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우리 테이블에 음식이 금방 나올 줄 알고 합류하셨는데, 우리 테이블의 음식이 가장 나중에 나오는 바람에 실망하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채식주의자 테이블에서는 강하라 선생님의 견과류와 강기훈 선생님의 김가루가 있어서 가장 푸짐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봉사지인 병원으로 이동했다. 이곳의 공휴일인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에서 담당 공무원들, 관계자들, 직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박병원 선생님의 한-라 통역을 통해서 서로 소개와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뒤에 진료소로 사용될 병원을 둘러보면서 어디에 어떻게 진료실과 검사실 등을 배치할 지를 결정했다. 건물이 총 3개가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건물들이 컸고, 출국 전에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부분도 있었다. 가운데 건물은 의과 진료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를 각각 치과와 약국이 사용하기로 했다. 진료실과 약국간의 거리가 멀어서 EMR을 사용하여 인쇄하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져온 짐을 풀고 장소에 맞게 세팅을 했다. 다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어서 세팅이 잘 이루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봉사지 세팅을 하는 동안 나는 EMR 사용을 위한 IP 공유기 설치를 했다. 약국과 진료실 사이의 거리 문제와 전원 공급 문제로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리허설을 해보지 못한 채로 저녁식사를 하러 이동했다.


저녁 식사는 또 다른 식당에서 했다. 봉사 기간 동안 매일 이곳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고 했다. 밥과 생선을 비롯한 몇 가지 메뉴가 제공되었는데 내 입맛에는 맞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대부분의 다른 학생들은 숙소로 돌아갔지만 나와 이수정 약사님, 주향이 누나, 윤석이, 김형준 선생님 등을 포함한 몇몇 직원 및 관계자들이 함께 병원으로 이동해서 세팅 마무리를 했다. 또한 김형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병원 내 무선 인터넷을 통해 프린터 드라이버를 다운받는 데 성공했다. 프린터는 다시 사무실로 가져간 상태였기 때문에 인쇄를 직접 테스트해 보지는 못했지만 일단 컴퓨터에는 드라이버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한편, 한여울 선생님께서 내가 오전에 부탁드렸던 심카드를 가져다 주셨다. 여러 번의 시행 착오 끝에 심카드를 바꾸어 끼우고 요금을 충전했지만 무선 인터넷은 되지 않았다. 아쉽지만 결국 현지에서 모바일 데이터는 사용하지 않고 지내기로 했다.


세팅 마무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소그룹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우리 소그룹에서는 박병원 선생님, 강하라 선생님, 조현정 선생님 3분께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지쳐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참여를 하지는 않았다.


소그룹 시간이 마친 뒤에 방에 돌아와서 강기훈 선생님과 함께 약속처방을 만들다가 돗자리 위에서 그냥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