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보관물: 증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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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8. 28일(토)

아침에 최해리 선생님께서 깨워주셔서 일어났다. 전날 잠이 부족해서인지 아직도 피곤한 상태였다. 최해리 선생님께서 나에게 먼저 씻으라고 하셔서 샤워하고 식사하러 갔다.
1층에서 방번호를 말하고 입장해서 식사했다. 메인메뉴가 나올 때까지 오래 걸린다고 하셔서 최해리 선생님을 위해 오믈렛을 미리 주문하고 나는 스크램블 에그를 주문했다.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빵, 과일, 음료수 등이 만족스러웠다. 이수정 선생님, 최해리 선생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짐을 챙겨서 1층에 모였다. 교회에 가져갈 짐은 가져가고 두고 갈 짐은 호텔에 맡기고 차를 타고 교회로 이동했다.
라오어를 영어로 통역해주시는 분께서 계셔서 안식일학교 시간이 답답하지 않았다. 또한 현정누나의 간증 시간이 있었는데, 현정누나가 한국말로 말씀하면 서준이가 영어로 통역을 하고, 서준이의 통역이 끝나면 현지 교인분이 라오어로 통역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교과공부 시간은 한국인들끼리 밖에 모여서 진행했다. 한글 교과책을 사전에 복사해서 준비해 둔 오이사님의 센스가 돋보였다. 강기훈 선생님이 교사를 맡아주셨다. 강기훈 선생님께서 안식일학교 교과를 가르치기 위해 잠시 공부하시는 동안, 자기가 존경하는 가족이나 사람에 대해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유미누나는 어머니를, 하라형은 강기훈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얘기했다. 이후의 교과공부를 통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의 인사말 속에서도 배울 내용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한 오해와 진실도 배웠다. 처음에 말씀한 대로 30분을 정확히 맞추어 교과공부를 끝내시는 강기훈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본받을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교과 공부 후에는 이날 설교예배 때에 특창할 찬미를 연습했다. 3절은 하라형이 오카리나 독주를 하기로 했다. 전날 저녁에 많이 준비했기 때문에 오늘은 점검 차원에서 연습을 한 번만 하고 마쳤다. 교회 피아노가 작동되지 않는다고 하여 아카펠라로 특창을 했다.
설교 말씀은 에베소서 3장 6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할 일에 관한 말씀이었다. 목사님은 라오어로 설교하시고, 중간에 앉아있던 교인 중 한 명이 뒤돌아 앉아서 영어로 통역해 주고, 그것을 다시 한 번 강기훈 선생님께서 한국어로 통역해 주셔서 설교말씀을 들었다.
점심 식사는 우리를 위해 따로 준비된 테이블에서 앉아서 했다. 예상과 달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았지만 아침에 식사를 너무 많이 한 탓에 제대로 먹지 못했다.
오후에는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쉴 사람과 돌아다닐 사람으로 그룹을 나누었다. 나는 쉬기로 결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211호에 모여서 잠을 잤다. 도중에 일어나 현정누나, 강기훈 선생님과 함께 호텔 수영장에 가서 발만 물에 담그고 쉬었다. 시편 121편, 126편을 읽기도 하고 강기훈 선생님의 연애학 개론 못다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전부터 수영장에 와서 쉬고 있었던 서준이, 하라형과 사진을 많이 찍기도 했다. 다시 211호에 가보니 밖에 가셨던 선생님들께서 돌아와 계셨다. 쉬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6시가 되어 로비로 모여 전날 점심 식사를 했던 채식식당으로 갔다. 전날 먹지 못했던 메뉴를 주문하기도 했고, 전날 맛있게 먹었던 메뉴를 다시 주문하기도 했다. 나는 최해리 선생님, 조수현 선생님, 이수정 선생님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했다. 식사 도중에 지난번에 김범태 기자님께서 보여주신 사진들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다시 보아도 재미있었다.
최대로 선생님께서 사오신 빵을 먹으면서 식사를 마무리하였다. 또한 김범태 기자님께서 지중해 빈혈 환자들과 일대일 결연을 맺자는 내용의 영상을 만들어서 보여 주셨다. 나도 무언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봉사대를 훌륭하게 마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식사 후에 다시 숙소로 이동했다. 일부 선생님들은 못다한 쇼핑을 하기 위해서 홈아이디얼에 다녀오셨다. 남은 사람들은 호텔 로비에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8시 40분이 되어 다들 모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은 숙소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탈 비행기가 이날 비엔티엔 공항에서 떠나는 마지막 비행기라는 것을 전광판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짐을 부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잘 해결되었다. 짐을 전부 부친 뒤에 현지에 남아 계실 분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출국수속을 밟고 검색대를 통과한 뒤에는 면세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에는 봉사대 규정상 면세점 쇼핑을 할 수 없었지만, 라오스에서 출발할 때에는 그러한 제한사항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면세점 쇼핑을 하러 갔다. 나에게 남은 5달러를 몇몇 엽서와 과일과자를 사는 데에 모두 사용했다.
비행기는 원래 출발 예정 시각인 11시가 되기 30분 전에 출발했다. 몇 분이라도 일찍 출발하면 공항 주차비를 아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었다. 주변에 앉으신 선생님들께서 곤히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잠을 청했다.
라오스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비행기 안에서 지나갔다.

후기 #7. 27일(금)

1시간 좀 넘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세수도 못한 채로 아침 예배에 참석했다.
 
이날 아침을 마지막으로 헤어져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생님들과 나, 그리고 아침까지 비전트립 참가 여부를 고민하다가 결국 귀국을 결정한 서준이는 비엔티엔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방비엥에서 며칠간 비전트립에 참여한 뒤에 귀국하기로 했다.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전날에 서준이는 봉사대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중에 방비엥에서 비전트립를 하는 도중에 읽어보도록 하려고 생각했었지만, 본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서준이는 편지를 통해 이번 봉사대에 와서 느낀 점들을 나누었고, 마지막으로는 각 봉사대원들을 한 명씩 언급하면서 그들의 장점들을 얘기했다. 편지 속의 나는 귀엽다고는 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형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 남았던 사람은 자신에게 봉사대를 소개해 주었던(그러나 비전트립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았던) 스마의 미래, 석형이였다.
 
편지 낭독이 마친 뒤에는 개인기도를 하면서 아침예배 순서가 끝났다. 예배가 마친 7시 39분에 윤석이가 공지하기를 모든 짐을 챙겨서 45분까지 모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45분까지 모이지 않았고 8시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짐을 모아서 내려왔다. 비전트립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비가 조금씩 내리는 중에 짐을 싣고 승합차와 트럭에 나누어 타고 출발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동안 국수를 먹던 식당으로 이동해서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 차량이 부족해서 한 차에 8명이 타고 식당으로 이동해야 했다. 나는 보조석에서 강기훈 선생님의 무릎에 앉아서 갔다. 자동차 창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괜찮았다. 식당에 가 보니 전날 작별인사를 했던 통역들 중 3명이 와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오기 전에 이미 식사를 했다고 했다. 오늘은 웬일로 국수가 간이 되어서 나왔다.
 
원래는 도자기 평원에 갈 예정이었지만 시간이 늦어져서 못 가게 되었다. 대신에 근처에 있는 불상을 구경하러 갔다. 통역 중 한 분이 고고학자였는데, 그 분이 관계자에게 연락을 해서 한 사람당 10,000킵이 드는 입장료를 받지 않고 무료로 관람했다. 다들 이게 유일한 관광이라 생각해서인지 사진을 많이 찍었다.
 
관람이 마친 뒤에 차를 다시 타고 공항으로 갔다. 11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비엔티엔으로 이동했다. 비행시간은 30분 동안이었는데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비엔티엔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금은철 선생님과 몇 마디 나누지 못해서 아쉬웠다.
 
찬타파냐 호텔에 도착해서 405호에 짐을 풀고 채식식당으로 이동해서 점심식사를 했다. 다양한 채식메뉴에 감탄하면서 이것저것 주문했다. 도중에 어린이병원에 다녀와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 현정누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밥이 다 나오기 전에는 가지 않겠다고 얘기했고, 하라형도 이에 동참했다. 결국 박병원 선생님을 필두로 다른 몇 분의 선생님들만 어린이병원으로 떠나셨다. 곧이어 음식이 나오는데 사진을 찍을 여유도 없이 음식이 사라져갔다. 마지막에 나온 코코넛밀크는 맛이 있었지만 너무 늦게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홈아이디얼이라는 대형마트에 하라형, 현정누나, 서준이와 함께 가서 기념품을 샀다. 다들 달러가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현정누나는 20달러 지폐에 뭔가 묻어 있다는 이유로 모자란 금액을 카드로 결제했는데 수수료 계산이 정확하지 않아 이를 처리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쇼핑 후에는 환전을 하러 갔다. 서준이가 나의 5달러 지폐와 현정누나의 문제의 20달러 지폐를 묶어서 한꺼번에 환전을 요구하니까 별 문제 없이 킵으로 환전해 주었다.
 
바로 가서 쉬고 싶었지만 서준이의 제안으로 현정누나와 나, 서준이는 마사지 샵에 갔다. 다양한 옵션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1시간 15분동안에 머리와 몸 마사지를 받기로 선택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란히 누워서 서로가 보이는 곳에서 마사지를 받았다. 짐을 분실할까 걱정이 되어 잠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느새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마사지가 끝나 있었다. 마사지 샵에서 차를 준비해 주었지만 벌써 모이기로 한 5시 반이 지난 시각이었기 때문에 못 마시고 그냥 가야 했다.
 
호텔 로비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리버사이드 호텔로 걸어서 출발했다. 도중에 사원에 들러서 사진도 찍었다. 야시장이 여는 시간이라 메콩강가는 한창 분주했다. 모형비행기를 날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리버사이드 호텔에 도착해서 5층에서 식사를 했다. 그곳에는 오이사님을 비롯한 다른 직원분들이 와 계셨다. 강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아직 날이 밝을 때에 사진을 여러 장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메뉴를 주문했는데 채식주의자 테이블이 가장 나중에 주문해서인지 음식이 늦게 나왔다. 그러나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되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을 했다. 내가 먹은 저녁 식사는 야채볶음밥, 매운 순두부 요리 등이었다. 음료수는 식사 전까지 마시면서 기다릴 생각으로 레몬에이드를 주문했는데 식사를 한 뒤에 디저트 형식으로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다같이 메콩강가에 나란히 앉아서 저녁예배를 드렸다.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으니 지나가던 라오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한동한 구경하다가 떠나기도 했다. 한명씩 앞에 나와서 이번 봉사대의 소감을 얘기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내가 거의 첫 번째로 나와서 얘기하고 들어간 뒤에 정신을 잃었다. 잠에서 깨보니 예배 시간이 거의 끝나 있었다. 마지막에는 김영선 선생님을 위한 폭탄기도를 하고 호텔로 출발했다.
 
내가 배정받은 숙소는 처음에 짐을 가져다 두었던 405호였다. 룸메이트는 최해리 선생님이셨다. 최해리 선생님께서 먼저 씻고 나는 나중에 씻었다. 샤워실에 들어갔는데 따뜻한 물이 나와서 너무 감동적이었다. 곤히 잠들었다.

후기 #6. 26일(목)

무료진료 마지막 날이다. 새벽에 눈을 뜰 때까지만 해도 이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꿈에도 몰랐다. 또한 핸드폰을 숙소에 그냥 두고 나온 것을 아침식사 후에 병원으로 이동하던 도중에 깨달을 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다.


이날은 전날과 달리 방문진료가 없어서 인원을 배치하기에 수월했다. EMR을 사용하는 것은 전날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전에 예진으로 시작했지만 도중에 조수현 선생님과 역할을 바꾸어 내과 진료보조를 하게 되었다. 진하는 박병원 선생님의 진료보조를, 나는 강기훈 선생님의 진료보조를 맡게 되었다. 강기훈 선생님께서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셨다.


사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나와 강기훈 선생님 뿐만이 아니었다. 전날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다형이는 결국 처음 배치된 약국 대신에 남자 물리치료실로 부서를 옮겼다. 나중에 듣기로는 다형이가 수액을 2L나 맞았다고 했다. 또한 봉사 기간 내내 부지런히 돌아다니시던 김형준 선생님이 안 보이셔서 어디 계신가 궁금해 했는데, 나중에 보니 몸이 안 좋으셔서 물리치료실에서 누워서 쉬시고 계셨다.


강기훈 선생님의 오전 진료는 오후 1시까지 계속되었다. 배고프고 지친 상태로 이곳 병원에서의 마지막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편식 채식을 하시는 자연 누나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했다. 이날은 웬일로 고기가 들어간 반찬 대신에 두부가 들어간 반찬이 제공되었다. 덕분에 식사를 다른 날보다도 더 맛있게 할 수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수현이의 부탁으로 인터뷰를 촬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동영상 촬영을 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장소를 옮겨서 재촬영 하기로 했다. 인터뷰 장소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진료실 복도를 지나가던 중에 오 이사님과 라오스 환자가 물리치료실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진료실 밖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다 보니 물리치료실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은 오 이사님과 라오스 환자가 아니라 윤선이 누나와 유진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후에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강기훈 선생님의 진료보조를 하게 되었다. 오전과의 차이점은 박병원 선생님께서 내과 진료실에서 자리를 옮기셔서 남자 물리치료실에서 진료하시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물리치료실에서도 무선 인터넷이 접속되어 처방전 인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부인과 진료실과 마찬가지로 인쇄된 처방전을 가지러 진료 보조 학생이 내과 진료실을 오가야 했다.


이날 오후 진료는 오후 3시까지 하기로 했다. 진료가 마쳐갈 즈음에는 처방전을 인쇄할 종이와 잉크가 거의 다 떨어져서 초조했다. 결국 종이는 다 떨어졌고 사용하지 않은 진료차트를 이면지로 사용하여 처방전을 인쇄했다. 다행히 마지막 처방전을 인쇄할 때까지 잉크는 끊기지 않았다.


진료를 마친 뒤에 짐 정리를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다. 폐회식을 마친 뒤에 다시 돌아와 짐 정리를 하기로 하고 몇 명씩 차를 나누어 타고 폐회식 장소로 이동했다. 폐회식 장소는 마을회관 같은 곳이었는데,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테이블에 흩어져 앉았다. 선생님들은 보다 앞쪽 테이블에 모여 앉으셨다. 나중에 출발한 팀들이 속속들이 도착해서 자리에 앉았다. 내 양 옆에는 진하와 다형이가 앉았다.


테이블에는 몇몇 음식과 장식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닭대가리였다. 과자들도 있었는데 대개 새우가 들어가 있어서 우리들이 먹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 외에는 삶은 계란과 몇몇 과일이 있었고 처음 보는 기구들이 있었다.


폐회식이 시작되고 라오스 씨엥쾅주의 ‘지도사’의 인사말과 최대로 선생님의 말씀을 비롯하여 이런 행사에 으레 포함되는 순서들이 진행되었다. 폐회식에 참석한 마을 주민들의 규칙적인 박수 소리를 들으며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상기하게 되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진하는 배터리가 다 떨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추가 배터리까지 준비해 와서 셀카를 찍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챙겨오지 못한 어리석음을 자책하면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인사말들이 끝난 뒤에는 봉사대원 한 명씩 나와서 도지사로부터 표창장을, 병원장으로부터 선물을 전달받았다.


그 이후에는 라오스 고유의 환영 의식이 시작되었다. 샤먼으로 보이는 사람이 앞에 나와서 한참 동안 주문을 외우더니 끝에는 쌀을 뿌려대서 깜짝 놀랐다. 그런 뒤에는 술을 마셔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들 양해를 구하고 사양했다. 그런 뒤에는 서로의 손목에 실을 걸어주면서 축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여러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맞아서 당황스러웠다.


그런 뒤에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테이블에 놓여져 있던 닭과 과자들이 치워지고 대신에 마을 사람들이 파트락 형식으로 준비해온 음식이 차려졌다. 참새고기 등을 보고 비위가 상한 나는 주로 람부탄과 망고만 먹었다. 그것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았는데 진하가 초콜릿을 나누어주어서 맛있게 먹었다. 진하의 준비성에 놀랐고 고마웠다. 장염에 걸려서 물만 마시고 있던 다형이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폐회식이 마친 다음에는 또 다시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이동했다. 매일 저녁마다 식사를 했던 식당에 이날 저녁에도 식사를 하기로 예약을 했었는데, 예약한 것이 취소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 앞서 과일만 먹었던 나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로 느껴졌다. 그곳에서 나, 진하, 유진이 등 몇몇 사람들만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 동안의 봉사활동 사진을 슬라이드 쇼로 보여주었는데, 이날은 다들 식사를 하지 않으니 사진에 집중했다.


식사 후에는 종이로만 피드백을 하고, 늦은 감이 있지만 그 동안 수고해주신 직원 분들과 통역 분들을 소개하고 둥글게 서서 복음성가를 불러주었다. 통역 분들도 라오스의 ‘이별의 노래’를 기타 반주와 함께 들려주었다.


통역 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남은 짐들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병원으로 이동했다. 물품들의 목록과 수량을 확인하고 박스를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당장 다음 날 아침까지 진료 통계를 산출해야 하는 상황을 맞아 나는 짐 정리에 참여하지 않고 차트 정리를 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짐 정리 작업이 끝난 뒤에는 다같이 진료실에 모여 서로 사진을 찍으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이 때에 나는 아침에 핸드폰을 챙겨오지 못한 것을 두 번째로 후회했다.


짐 정리를 마친 뒤에는 숙소로 이동했다. 나는 숙소에서 차트 정리를 위한 프로그램을 완성하고 뒤늦게야 김범태 기자님께서 준비한 사진전을 보러 갔다. 사진들마다 이야기가 있었고 감동과 즐거움이 있었다. 내가 나온 사진 중에는 전날 정전되었을 때에 산부인과 진료실의 조명 역할을 하던 일명 ‘용감한 녀석들’ 사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참고로 그 사진은 스무 번 넘는 반복 촬영 끝에 얻어진 작품이다.


사진전이 마친 뒤에는 전날에 이어 강기훈 선생님의 사랑학 각론 시간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그 동안의 봉사 기간 동안의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폐회식과 짐정리, 사진전 등을 거치면서 지쳐 있어서 강기훈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노트북을 이용하여 좀 전에 만든 차트 정리 프로그램으로 최대로 선생님과 함께 차트 정리를 했다. 사랑학 각론은 좋은 시간이었지만 길게 진행되지 못하고 일찍 끝나서 아쉬웠다.


사랑학 각론 시간이 끝난 뒤에는 의대 고학년인 구원 누나와 윤선이 누나가 차트정리에 합류했다. 그러나 일손이 부족해서 금방 끝나지 않았다. 결국 자고 있던 진하를 깨워서 데리고 와서 함께 차트 정리를 했다. 도중에 최대로 선생님께서는 먼저 쉬러 가셨다. 나머지 사람들은 새벽 3시까지 남아서 700여명의 환자 자료를 입력했다. 다들 너무 고생해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한국에 돌아오면 이들에게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결국 새벽 3시가 되자 체력의 한계를 만나 다들 자러 돌아갔다. 남은 환자 300여명의 자료를 입력하다 보니 날이 밝았다. 중간중간에 생전 보지 못했던 거대한 곤충들을 화장실에서 만나서 잠이 확 달아났다. 새벽 6시쯤에는 일찍 일어난 현정이 누나가 구경을 오시기도 했다.


결국에는 모든 입력 작업을 끝냈다. 아침에 눈을 뜬지 24시간만에 잠자리에 들었다.

후기 #5. 25일(수)

전날도 일찍 잠들었기 때문에 이날은 일찍 일어났다. 샤워를 하면서 아침을 준비했다. 아침예배 후에 식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부서배치를 알려주었다.

 

이날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기술이전 세미나와 방문진료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학생들을 배치했다. 오전에는 강기훈 선생님이 방사선 영상에 관한 기술 이전 세미나에 강연을 하러 다녀오시게 되었다. 방문진료의 경우에는 몇 가지 사정이 있어서 배치표와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결국 방문진료에는 강하라 선생님, 김영선 선생님, 지혁이 형 그리고 주향이 누나 등 면허가 있는 대원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병원에 남아 오전에는 예진을 하고 오후에는 내과진료보조를 하기로 했다. 예진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조범수님과 함께 진행했다. 전날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조범수님의 통역이 훌륭해서 힘들지 않게 오전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다.

 

전날과 달랐던 점 중 하나는 봉사 첫날에 문제가 있어 중단했던 EMR을 다시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약국에서 처방전을 인쇄하는 것은 거리가 멀어 포기하고 진료실 내에서 처방전을 인쇄해서 환자에게 주면 환자가 자신의 차트와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에 가서 약을 처방 받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오전에는 시험적으로 조현정 선생님 진료실에 노트북과 프린터를 설치해 두고 산부인과 환자를 대상으로만 사용했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오전 봉사활동을 무사히 마치고 점심식사를 한 뒤 남는 시간에는 물리치료실에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오후부터는 조현정 선생님 뿐 아니라 강기훈 선생님과 박병원 선생님께서도 EMR을 사용하시기로 했기 때문에 프린터와 네트워크를 설정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산부인과 진료실에 설치되어 있던 프린터를 내과 진료실로 옮기고 강기훈 선생님 노트북과 연결했다. 설치된 프린터를 네트워크로 공유하여 다른 노트북에서도 강기훈 선생님 노트북을 통해 인쇄가 되도록 했다. 산부인과 환자들의 처방전의 경우에는, 산부인과 진료 보조 담당이 내과 진료실에 찾아와서 인쇄된 처방전을 받아가기로 했다.

 

곧이어 오후 진료가 시작되었고, 나는 내과 진료실에서 박병원 선생님의 진료를 보조하면서 EMR도 관리했다. 본과 3학년 때에 병원에서 내과 실습을 할 때에는 주로 입원 환자를 보았고 내과 외래를 참관할 기회는 드물었다. 이번에 박병원 선생님의 외래 보조(실제로는 참관)를 하면서 내과 외래가 이렇게나 체계적이고 흥미롭다는 점을 처음으로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혈전이 있는 환자였는데, 초음파 상에서 좌심실 첨부에 커다란 혈전이 뚜렷하게 보여서 신기하기도 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오후 진료 도중에 단체 사진 촬영을 하러 모이기도 했다. 이날이 마지막 진료일은 아니었지만, 다음 날에는 진료를 일찍 마치고 폐회식에 참여해야 해서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는 이날에 사진 촬영을 하게 되었다.

 

오후 내내 EMR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IP공유기와의 무선 연결이 가끔씩 끊어지는 문제가 있었지만 이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 드물지 않게 병록번호가 중복된 환자가 있어서 하나의 처방전 안에 다른 선생님의 처방이 잘못 포함된 경우가 있었는데, 그 경우에는 잘못된 처방을 수작업으로 지우기도 했다.

 

그러나 진료가 끝나갈 즈음에 EMR을 중단하고 수기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정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EMR 중단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초음파 검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고, 창문이 없는 산부인과 진료실에서는 조명이 없이는 진료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였다. 전원이 몇 분 안에 들어올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 때까지는 내 핸드폰의 플래시를 조명으로 사용하여 산부인과 진료를 보조하기로 했다. 그러나 20분이 넘게 지나도록 정전이 지속되었고, 결국 조수현 간호사님에게 조명 역할을 넘겼다. 진료가 마칠 때까지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은 매일 저녁마다 가던 식당이 아니라 첫날 점심에 국수를 먹었던 식당에서 먹었다. 이날의 저녁식사비는 김범태 기자님께서 내셨다. 국수를 먹는 동안에 일부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과일을 사러 시장에 다녀왔다. 최대로 선생님께서도 많은 돈을 보태주셔서 저녁식사 시간에 다양한 과일을 맛볼 수 있었다.

 

식사 후에는 저녁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숙소로 이동했다. 이날은 특별히 소그룹 시간 이전에 강기훈 선생님의 사랑학 개론이 있었다. 독신의 은사는 아무나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다. 끝날 무렵에는 자신의 이상형이 어떤 사람인지 등을 쪽지에 적어서 제출했다. 내 옆 자리에 비몽사몽인 상태로 앉아 있던 예은이의 쪽지는 내가 대필해 주었다.

 

이후에는 각 조로 나뉘어 짧게 소그룹을 했다. 이날 처음으로 저녁 프로그램에 합류한 김범태 기자님께서 방들을 돌아다니면서 소그룹 장면을 촬영했다. 촬영을 마친 뒤에도 소그룹 시간은 계속되었고, 김범태 기자님께서는 우리 소그룹에 합류하셨다. 기자님이 어떻게 기자가 되셨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에 대해 듣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기자님의 연세도 알게 되었는데, 동안이셔서 깜짝 놀랐다.

 

소그룹이 마친 후에는 방으로 돌아왔다. 몸 상태가 나보다 더 좋지 않은 다형이가 강기훈 선생님께 치료를 받으러 온 것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후기 #4. 24일(화)

아침 6시에 모닝콜을 듣고 잠시 깼다가 다시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전날에 춥게 잠들었기 때문인지 몸이 으슬으슬했고 목도 좀 부어 있었다. 방 밖으로 나가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면 환자가 적게 올 것이고, 그러면 전날만큼의 혼잡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씻고 6시반에 예배를 드리러 모였다. 오늘 아침 말씀은 현지 통역이 자신이 하나님을 믿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는 간증시간이었다. 불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대학교 유학 때문에 재림교 목사인 삼촌 집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된 과정을 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폐암에 걸리고,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지만 아버지가 사망하고,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다. 특히 서준이의 정확하면서도 재치 있는 통역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좋았던 시간이었다.

 

예배 후에는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이날은 특별히 강하라 선생님의 오카리나 연주가 있어서 좋았다. 연주는 다 좋았지만 변주를 시도했던 마지막 곡에서 잘 연주가 되지 않아 용두사미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옥에티였다.

 

식사 후에 진료소로 이동했다. 비가 왔기 때문에 다들 한국에서 공동 구매한 우비를 입고 차에 탔다. 많은 학생들이 트럭 짐칸에 타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해 보일 텐데, 거기에다가 알록달록한 색깔의 우비마저 입고 있으니 라오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적게 와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빗물로 인해 땅바닥이 젖어 있어서 트럭에서 내리면서 발이 진흙 범벅이 되었다. 발이 젖지 않고 내릴 수 있는 곳에 차를 세워줬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석이가 나서서 건강교육 장소 주위에 줄을 감고 번호표를 만들었다. 진료 준비를 하면서야 듣게 된 사실은 전날에 300여명의 환자들에게는 차트를 주어서 돌려보냈고 그 사람들이 오늘 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차트를 전부 걷어서 보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세웠던 계획을 즉석에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전날에 걷어서 보관하고 있던 모든 차트를 통역들을 통해서 환자들에게 전부 다시 나누어 주었다. 오늘 처음 온 환자들의 경우에는 오늘은 진료를 받을 수 없고 다음 날에 찾아오도록 안내하고 번호표를 주어 돌려보냈다. 전날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진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별표 스티커를 받았던 환자들을 우선적으로 접수 받아 진행했고 그 이후에는 차트번호가 빠른 사람부터 순서대로 들여보내서 진료했다.

 

방문진료는 강기훈 선생님께서 진하와 함께 가시기로 했다. 체중과 키만 재기로 했던 기존 계획에서 바뀌어서 진료까지 하게 되었고, 방문진료로 배정해 두었던 사람들의 명단에도 변경이 있어서 혼란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다.

 

조현정 선생님은 기술이전 세미나를 하러 도립병원에 다녀오셨다. 그런데 하필 조현정 선생님께서 도립병원에 가 계신 오전 동안에 진료실에 찾아와 아이를 분만한 산모가 있었다. 아이와 산모의 상태가 둘 다 좋지 않았지만, 여러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분만과 그 이후의 조치가 잘 이루어졌다.

 

나는 오전에 예진, 오후에 진료보조를 했다. 오전 예진은 한-라 통역을 하시는 조범수님과 함께 진행했다. 아무래도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말이 잘 통했고, 의학 용어도 어느 정도 이해하셨기 때문에 예진하기가 힘들지 않았다. 또한 진료 둘째 날이어서 그런지 전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질서 유지도 잘 되었다. 오후에는 최대로 선생님의 진료 보조를 하면서 물리치료/ECG도 함께 했다. 이날은 질서 유지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EMR을 사용하지 않았다. 약속처방을 손으로 옮겨 적고 cosign을 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진료를 마친 뒤에 전날 저녁을 먹었던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왔다. 용과와 렁간 등의 과일이 제공되었던 것은 좋았다. 나는 전날과 달리 채식주의자 자리에 같이 앉아서 식사를 했다. 현정이 누나가 파래김을 챙겨오셔서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다만 다들 밥을 거의 다 먹고 난 다음에야 파래김을 기억해 내신 것은 약간 아쉬웠다. 후식으로는 라면을 먹었다. 원래는 숙소에서 끓여 먹으려고 가져왔던 라면이었지만, 숙소에서 조리를 할 수가 없어서 이곳 식당에서 만들어 먹은 것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라면이었기 때문에 맛있게 먹었지만 내 입맛에는 짜게 느껴졌다.

 

식사 후에 피드백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피드백 후에 현정이 누나는 분만중인 산모를 보러 몇몇 사람들과 함께 다시 병원에 가셨다. 남은 사람들은 박병원 선생님의 지중해빈혈에 관한 사업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 라오스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박병원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한 번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그때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박병원 선생님께 대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 소그룹을 했다. 이날은 우리 1조가 1층에서 소그룹을 하는 날이었다. 박병원 선생님은 다른 숙소에서 잠을 주무시게 되어서 함께하시지 못했다. 조현정 선생님은 분만하는 산모를 보러 가시느라 병원에 가 계셔서 함께하시지 못했다. 남은 6명이 2개의 침대에 3명씩 나누어 앉아서 소그룹을 했다. 유민이가 조장으로서 잘 지도해 주었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짧지만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소그룹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잠들었다.

후기 #3. 23일(월)

무료진료 첫날이다.

 

전날 밤에 배낭을 꺼낼 틈도 없이 돗자리에 쓰러져 잠들었다. 잠들기 직전에 6시로 모닝콜을 맞추어 두었는데, 모닝콜이 울리기 전 새벽에 추워서 잠에서 깼다. 일어나 씻고 모여서 봉사대 책자에 있는 말씀을 읽으면서 아침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 아침 식사를 했다. 이날은 내가 식사당번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 캐리어에 담아왔던 콩자반과 양파 절임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은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기 전에 반찬들을 모아서 한 박스에 넣어 가지고 왔다고 했는데, 당시에 그 공지를 듣지 못했던 것이 여러 모로 아쉬웠다. 뷔페 형식으로 반찬들을 꺼내놓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라오스에 와서도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처음에는 접시 개수가 부족해서 걱정을 했지만, 밥이 일회용 도시락 용기에 담겨 있어 굳이 접시를 가져올 필요 없이 일회용 도시락 용기 뚜껑에 반찬을 담아서 먹으면 되었다. 게다가 식사가 끝난 뒤에는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이 식탁과 반찬통만 정리하면 되었기 때문에 시간도 줄이고 일손도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한국 음식이어서 그런지 다들 맛있게 식사를 했다. 식사하면서 학생들에게 이날의 배치표를 알려주었다. 나는 하루 종일 예진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힘들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힘들지에 대한 감이 없었다.

 

봉사지로 이동해서 전날 밤에 확인했던 위치에 IP공유기를 설치했다. 이날 나누어준 사랑나눔의사회 조끼를 입고 그 위에 SMA 패치를 달았다. 각자 배치된 부서로 이동하기 전에 내과 진료실에 모여서 기도하고 시작했다.

 

진료 첫날이었기 때문에 봉사 시작 전에 개막식이 있었다. 9시 넘어서 행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되었다. 각자 배정받은 위치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전날 얼굴을 확인했던 라오스인 영-라 통역과 함께 예진을 시작했다. 진료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방전의 문제가 있어서 EMR은 중단하고 수기로 전환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나마 수기와 병행했기 때문에 더 큰 혼잡은 빚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예진실은 처음에는 환자가 없어서 한산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환자가 갑자기 몰려와서 병원 안이 혼잡해졌다. 원래의 계획은 접수를 마친 환자들이 건강교육을 받으면서 대기하고 있다가 진료소에 자리가 생기면 몇 명씩 데려와서 예진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차트를 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번호 순서와 무관하게 진료실로 몰려들었다. 몇 명의 환자들만 진료실 안쪽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진료실 정문을 잠가 두었으나, 진료실 정문에 있는 창문에 유리가 없이 뚫려 있어서 환자들이 창문 안으로 손을 넣어서 잠긴 문을 열고 예진실로 들어왔다. 김형준 선생님과 한여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환자들에게서 차트를 걷어다가 번호 순서대로 이름을 불러주어서 임시적으로 대처했지만 혼잡은 피할 수 없었다.

 

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지치고 화가 났지만, 막상 예진을 하면서도 이름만 적혀 있는 차트를 보면서 울컥했다. 성별, 나이, 활력징후 등을 접수에서 물어보고 측정해서 기록해 주었더라면 환자가 몰려드는 속도가 조절되어 예진실 내의 혼잡이 덜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진을 하면서 내가 모든 환자에게 나이를 물어보고 성별을 적을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힘겨운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 식사를 하면서 잠시 쉬었다. 오전에 문제가 되어서 중단했던 EMR을 점심 식사 후 쉬는 시간에 고쳤다.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핸드폰에서 EMR에 접속할 수 있도록 수정했던 부분이었다.

 

점심 식사 이후에도 오전과 마찬가지로 예진을 했다. 직원 분들과 현지 인력의 도움을 받아 진료소 정문을 열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으니 출구로 사용하는 진료소 양 옆 문으로 환자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무질서함과 혼잡함에 화가 났지만 나중에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주변에 계시던 김형준 선생님과 한여울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나마 힘을 냈다. 사실 이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진료소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질서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이러한 현상 뒤에는 그들의 절실함과 필요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무질서하고 혼잡한 모습도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직 질서와 예절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데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 환자들이 착하고 순박하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진료가 늦어지는 상황에서 기다리라고 한 마디 하면 그 말에 따라서 아무 불평 없이 계속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 진료가 마칠 시간이 될 때까지 남아 있는 40명정도의 환자들에게는 내일 진료의 우선권을 주겠다고 하고 이름을 적고 별표 스티커를 주어 돌려보냈다. 차트는 병원에 보관했다. 예진을 마치고 나니 문제가 일단락 된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일부터 또 다시 예진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잘 된 점과 개선할 점을 적어야 하는 피드백 용지를 김형준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 도무지 잘 된 점을 적을 뻔뻔함이 없어 고민하면서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이동했다.

 

기분 탓인지 이날 준비된 저녁 식사는 너무나 맛이 없었다. 나는 채식을 하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었지만 고기반찬에 들어간 향신료가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고 했다. 그나마 나는 조미료 냄새는 조금 났지만 야채반찬이 있어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다해갈 즈음 계란오믈렛이 제공되었다. 어제 저녁에 이어 유진이가 내 왼쪽 자리에 앉았는데, 내가 계란오믈렛을 먹을 동안에는 구경만 하다가 내가 남은 계란오믈렛을 옆 테이블에 다 주려고 하니까 그제서야 오믈렛을 달라고 얘기해서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식사 중에 진하의 밥을 너무 많이 덜어 먹어서 핀잔을 듣기도 했다.

 

식사 후에 피드백을 하다 보니 오후에 EKG실에 있었던 진하와 지혁이형이 오후 내내 나 때문에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하는 EKG 기계에 과부하가 걸려서 멈춘 잠깐 동안에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고 했다. 지혁이형은 다리 통증을 주증상으로 호소한 할아버지를 예진 후에 심전도를 찍으러 보낸 것을 보고 울컥했다고 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을 지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날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어지럼증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기립성 저혈압으로 의심되는 증상이 있었는데,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언제 어지러운 증상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고 그냥 심전도를 찍으러 보냈기 때문에 심전도실에 과부하가 걸렸던 것이었다.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는 고령 환자인 경우에만 심전도를 찍기로 해서 EKG실의 과부하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예진실의 과부하 문제는 접수에서 소아 환자를 비롯한 몇몇 환자들의 경우 예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진료실로 환자들을 보내어 해결하기로 했다. 피드백이 마친 후에는 백과장님의 특강을 들으며 라오스 보건사업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식당에서의 일정이 마친 뒤에는 학생 숙소로 이동했다. 밤 9시 이전에 숙소에 도착하면 소그룹을 하고, 그 이후에 도착하면 소그룹을 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날 도착한 시각은 아슬아슬하게 9시가 지난 때였기 때문에 소그룹 대신에 단체로 예배를 드렸다. 말씀은 현정이 누나가 준비했는데,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환자를 만났을 때에,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기도를 해주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았다. 이날 내 능력의 한계를 만났을 때에 내가 대처한 모습이 생각났고, 내 모습과 현정이 누나의 모습이 대비되어 부끄러움과 함께 깨달음을 얻었다.

 

예배가 마친 이후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찬양을 드렸다. 강기훈 선생님, 조현정 선생님, 강하라 선생님들의 곡에 대한 해설과 윤석이의 기타 반주가 어우러져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노트북을 가져와서 배치표를 작성했고, 배치표를 다 작성한 후에는 함께 찬양을 했다.

 

방에 와서 다음날 진료에서 혼잡이 벌어지지 않을 방법을 강기훈 선생님과 윤석이와 함께 이야기 나누다가 어느 새 잠들었다. 다행히 이날은 침낭 안에서 잠들었다.

후기 #2. 22일(일)

아침에 지혁이 형이 깨워서 일어났다. 다행히 샤워실들이 비어 있어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캐리어에 담아온 반찬에서 양파즙이 새어 나와 내가 챙겨온 유일한 수건을 적신 상태여서 양파즙에 닿지 않은 부분으로만 몸을 닦았다. 방에 돌아와서야 전날 밤에 호텔에서 개인별로 나누어 준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 7시에 아침 예배를 드리는 줄 알았는데, 식사를 먼저 한 이후에 아침 예배를 드리는 일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토스트와 과일 등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전날 밤에는 칼이 없어서 먹지 못했던 망고를 이날 아침 식사 후에 먹게 되었는데 다들 덜 익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대했던 것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아침 식사가 끝날 때까지 석형이와 서준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에 현지 라오스 목사님을 통한 간단한 예배를 드렸다. 사실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떤 기도를 하시는지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햇볕은 강하고, 내가 앉은 자리는 목사님과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영어를 잘 못하고, 목사님도 영어를 잘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듣게 된 사실은 목사님이 처음에는 영어로 기도를 시작하셨지만 나중에는 라오어로 기도하셨다는 것이었다. 영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전날 밤에 찬타파냐 호텔에서 묵으셨던 선생님들께서 예배가 끝날 즈음에 우리 숙소로 찾아오셔서 합류하셨다.


예배 후에는 짐을 챙겨서 차 두 대에 나누어 믹사이 파라다이스 호텔을 떠났다. 전날 밤에 312호에서 과일을 먹었던 사람들은 호텔에서 빌려준 수건 위에 과일을 올려두고 먹어서 수건 하나를 못 쓰게 만들었기 때문에 배상을 하기도 했다.


봉사지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부쳤다. 짐이 많고 무거웠지만 항공사 측에서 많이 협조해 주어서 어렵지 않게 짐을 보냈다. 짐을 부치는 중에 남는 시간에 심카드를 사러 공항 내 매점에 갔는데, 공항이라서 특별 가격을 받는다며 원래 가격의 5배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박병원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바가지를 쓸 뻔했다. 결국 심카드는 한여울 선생님께 부탁드려서 나중에 현지 시내에서 구입하기로 했다.


짐을 부치고 출발 수속을 밟은 이후에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이수정 선생님께서 나와 상훈이, 주향이 누나 등을 부르셨다. 무슨 일로 불려갔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단체짐을 맡게 된 것이었다. 나는 E1~5번 박스를 맡았는데, 나머지 박스들은 트럭으로 봉사지까지 이동하고, 비행기에는 E1, E3 박스만 실리게 된다고 했다.


출발 시각이 되어 비행기까지 걸어서 이동하면서 본 비행기의 모습은 아담하고 신기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양쪽 날개에 하나씩 달려 있는 커다란 프로펠러는 이것이 국내선 비행기임을 알게 해 주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약간 시끄럽고 덜컹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문제 없이 금방 비행이 끝났다.


씨엥쾅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에 의외로 덥지 않은 날씨와 습하지 않은 공기 때문에 놀랐다. 더불어 봉사대 기간 동안 날씨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버스터미널을 연상시키는 공항의 작은 규모였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공항까지 걸어가는 자갈밭도 낯설었고, 부쳤던 짐을 비행기에서 내려 리어카에 싣고 공항까지 나르는 모습도 낯설게 느껴졌다.


공항에서 부쳤던 짐을 찾고 수속을 마친 후에 트럭 2대에 나누어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내 옆에는 진하와 은섭이형이 있었는데, 다들 앉아서 가지는 못했지만 라오스의 자연 풍경과 의외로 잘 정비된 길에 만족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다만 우리가 탄 트럭은 무게 때문인지는 몰라도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트럭들에 추월 당해 앞차의 매연을 맡아야 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1시간 정도 이동하여 쿤 지역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는데, 처음에는 낡은 학교 건물을 보고 실망했지만 실제 숙소는 학교 건물 뒤에 있는 기숙사 건물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는 각 층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는 2층 건물이었고, 처음에는 남학생이 1층, 여학생이 2층을 쓰기로 했지만 침대가 주로 1층에 있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을 배려해서 층을 맞바꾸어 쓰기로 했다. 덕분에 2층에 있던 침대를 1층으로 줄에 달아 내리는 진풍경을 보기도 했다.


선생님들 중 몇 분께서는 학생들과 같은 숙소를 쓰시기로 하셨는데, 최대로 선생님, 박병원 선생님, 현지인 통역 2명이 2층 오른쪽 끝 방을 쓰시고, 강기훈 선생님과 강하라 선생님, 나머지 남학생들은 4개의 방을 쓰기로 했다. 각 방마다 3명씩 사용하면 되는 상태였는데 강하라 선생님과 윤석이는 잠을 잘 때의 생리적인 이유로 인해 오른쪽 2번째 방에 배정되었다. 나는 강기훈 선생님과 함께 오른쪽 3번째 방을 쓰기로 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2개의 방에 4명씩 모여서 자기로 했다.


그런데 캐리어를 끌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 보니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신축 기숙사라고 해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방 바닥에도 아무것도 없어서 가져온 침낭을 깔고 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콘센트가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방마다 큰 생수통 하나와 휴지, 인원수만큼 컵과 돗자리가 제공되어서 도움이 되었다.


우선은 숙소에 캐리어를 가져다 두고 필요한 짐만 챙겨서 점심식사를 하러 숙소를 떠났다. 도중에 선생님 숙소에 잠시 들렀다가 점심 식사를 하러 한 식당으로 이동했다. 점심 식사는 채식주의자끼리 모여서 먹었다. 메뉴는 고기국물을 사용하지 않은 국수였는데 맛은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문했다. 음식은 간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김영선 선생님은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우리 테이블에 음식이 금방 나올 줄 알고 합류하셨는데, 우리 테이블의 음식이 가장 나중에 나오는 바람에 실망하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채식주의자 테이블에서는 강하라 선생님의 견과류와 강기훈 선생님의 김가루가 있어서 가장 푸짐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봉사지인 병원으로 이동했다. 이곳의 공휴일인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에서 담당 공무원들, 관계자들, 직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박병원 선생님의 한-라 통역을 통해서 서로 소개와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뒤에 진료소로 사용될 병원을 둘러보면서 어디에 어떻게 진료실과 검사실 등을 배치할 지를 결정했다. 건물이 총 3개가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건물들이 컸고, 출국 전에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부분도 있었다. 가운데 건물은 의과 진료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를 각각 치과와 약국이 사용하기로 했다. 진료실과 약국간의 거리가 멀어서 EMR을 사용하여 인쇄하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져온 짐을 풀고 장소에 맞게 세팅을 했다. 다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어서 세팅이 잘 이루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봉사지 세팅을 하는 동안 나는 EMR 사용을 위한 IP 공유기 설치를 했다. 약국과 진료실 사이의 거리 문제와 전원 공급 문제로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리허설을 해보지 못한 채로 저녁식사를 하러 이동했다.


저녁 식사는 또 다른 식당에서 했다. 봉사 기간 동안 매일 이곳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고 했다. 밥과 생선을 비롯한 몇 가지 메뉴가 제공되었는데 내 입맛에는 맞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대부분의 다른 학생들은 숙소로 돌아갔지만 나와 이수정 약사님, 주향이 누나, 윤석이, 김형준 선생님 등을 포함한 몇몇 직원 및 관계자들이 함께 병원으로 이동해서 세팅 마무리를 했다. 또한 김형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병원 내 무선 인터넷을 통해 프린터 드라이버를 다운받는 데 성공했다. 프린터는 다시 사무실로 가져간 상태였기 때문에 인쇄를 직접 테스트해 보지는 못했지만 일단 컴퓨터에는 드라이버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한편, 한여울 선생님께서 내가 오전에 부탁드렸던 심카드를 가져다 주셨다. 여러 번의 시행 착오 끝에 심카드를 바꾸어 끼우고 요금을 충전했지만 무선 인터넷은 되지 않았다. 아쉽지만 결국 현지에서 모바일 데이터는 사용하지 않고 지내기로 했다.


세팅 마무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소그룹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우리 소그룹에서는 박병원 선생님, 강하라 선생님, 조현정 선생님 3분께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지쳐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참여를 하지는 않았다.


소그룹 시간이 마친 뒤에 방에 돌아와서 강기훈 선생님과 함께 약속처방을 만들다가 돗자리 위에서 그냥 잠들었다.

후기 #1. 21일(토)

오전 일정을 마치고 혼자 캐리어와 배낭을 가지고 인천국제공항역에 도착한 시각은 1시반경이었다. 모이기로 공지된 3시까지 남은 시간 동안 인천국제공항역 대합실에 앉아 마무리 작업을 했다. 도중에 무의도로 가는 외국인들이 길을 물어보아 용유임시역으로 가는 길안내를 해주었다. 인천국제공항역 다음에도 지하철역이 있다는 사실을 나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3시쯤 인천국제공항 출국층 D열에 가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도 있었고 이날 처음으로 만난 얼굴들도 있었다. 구면이지만 이름은 몰랐던 사람도 있었다. 조수현 선생님은 이미 알고 있는 유미누나의 언니였다. 구면이지만 처음에는 못 알아봤던 사람도 있었다. 김형준님은 머리를 짧게 깎고 나타나서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임치과에서 단체짐을 가지고 출발한 사람들도 도착하고, 각자 공항으로 오기로 했던 사람들이 연이어 도착했다. 인원체크를 한 뒤에 출국 수속을 밟았다. 일행을 1그룹과 2그룹으로 나누어 짐을 부쳤다. 치과장비 등 짐을 부치는 데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짐들을 1그룹 학생들 이름으로 먼저 부쳤다. 2그룹에서는 나머지 단체짐들과 큰 캐리어들을 부쳤다. 담당 직원의 배려로 대부분의 캐리어들까지 부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2그룹에 합류하신 강기훈 선생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캐리어들이 먼저 부쳐지는 바람에 직접 캐리어를 가지고 비행기에 타셔야 했다. 강기훈 선생님 이외에도 부치지 못한 캐리어들은 들고 비행기에 탑승해야 했다. 부치지 못한 캐리어 중 예은이 캐리어가 문제가 되었는데, 화장품이 들어 있어 그대로는 가지고 탑승할 수 없었다. 이수정 약사님의 도움으로 화장품들을 다른 여러 캐리어에 부피 제한에 걸리지 않을 만큼 나누어 담고 무사히 탑승할 수 있었다. 짐 부치는 게 마친 뒤에는 목사님의 기도와 단체사진촬영을 하고, 탑승구에서 5시반까지 모이기로 하고 흩어졌다.


나는 로밍에 대한 안내를 받으러 공항을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간신히 KT 로밍 센터를 찾아서 로밍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해외에서 데이터 로밍이 되지 않도록 하는 서비스와, 국내에서 내 전화로 전화를 걸면 내가 해외 로밍 중임을 알려주는 서비스(둘 다 무료)를 신청했다. 또한 로밍 중 전화 요금에 대해서도 안내 받았는데 문자 메시지는 수신 무료, 발송 300원이었다. 로밍 안내 후에 면세점 할인권도 받았지만 이번에 규정상 출국 시 면세점 이용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용할 일은 없었다.


혼자 출국 수속을 밟고 면세점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수정 약사님을 비롯한 사람들의 무리를 만나서 셔틀트레인을 타고 탑승구로 이동했다. 모이기로 한 탑승구에 가 보니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노트북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초아가 내게 컴퓨터를 지배하는 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조금 뒤에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고, 둥글게 서서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최대로 선생님부터 시작해서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연결 문제로 비행기 출발이 늦어져 소개가 끝난 뒤에 조금 더 기다리다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 안에서 내가 배치된 자리는 두 선생님들 사이였다. 박병원 선생님과 김영선 선생님 사이에 앉아 좋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박병원 선생님에 대해 잘 몰랐는데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대단한 분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는데 마음이 급해서 기내식을 실수로 쏟아서 일부를 못 먹게 되었다. 승무원에게 남은 기내식이 있으면 바꾸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여분의 음식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남은 기내식이나마 맛있게 먹었다. 이런 상황을 알았는지 뒷자리에 앉아있던 진하가 빈츠를 나누어 줘서 고마웠다.


5시간 동안 비행하여 비엔티엔에 있는 공항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수속을 밟았다. 입국심사대에는 다른 한국인들도 있었다. 인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라오스에 와서 어린이 교육을 4주간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인도에서 라오스로 올 때에 석형이와 유진이와 같은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우리가 의료봉사대에 참가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 오이사님과 한여울님을 비롯하여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목적지에 따라 짐을 나누어 싣고 학생들은 믹사리 파라다이스 호텔로, 선생님들은 찬타파냐 호텔로 떠났다.


믹사리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학생들은 2명씩 짝지어 3층 또는 4층에 있는 객실을 배정받았고 나는 지혁이형과 함께 411호에 짐을 풀었다. 짐을 풀 때에는 몰랐는데 3층의 객실들은 방별로 화장실/샤워실이 있었고 에어컨까지 나왔다. 그래도 우리가 쓰는 방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선풍기가 있고 침대가 크고 깨끗해서 만족스러웠다. 또한 와이파이를 밤 11시반까지 이용할 수 있어서 국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숙소 사진을 보내드리고, 스마 홈페이지에 잘 도착했다는 글을 올렸다.


밤 11시에는 다같이 ground층에 모여 도착예배를 드렸다. 공지가 약간 늦어서 샤워하고 있던 일부 3층 학생들은 예배시간에 늦어서 4층 학생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다. 이번 봉사대 기간에 함께하지 못한 충실형을 대신해 봉사기간동안 신덕부장을 맡은 지혁이형이 준비한 말씀을 들으면서 도착예배를 드렸다. 길지는 않았지만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예배를 드린 후에는 현지에서 사주신 용과(dragon fruit)와 용안(longan) 을 먹을 수 있었다. 예배를 드렸던 로비는 밤 11시반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 로비 외에는 다같이 모일 넓은 장소가 없어서 과일 먹을 장소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몇 개의 방에 흩어져서 과일을 먹기로 했다. 물론 에어컨이 있는 310, 311, 312호에만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311호에서 윤석이, 주향이 누나, 은섭이형, 수현이, 예은이, 수현이 등과 함께 과일을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용과는 별 맛은 없었지만 다들 목이 마른 상태였기 때문에 잘 먹었다. 용안은 윤석이가 잘 먹었다. 누군가 부작용이 있다고 했지만 개의치 않고 맛있게 먹었다. 부작용이 ㅂㅂ인지 ㅅㅅ인지 논란이 일었지만 결론 없이 끝났다. 건강교육을 준비한 사람들과 봉사기간에 건강교육을 할 사람들은 중간에 다른 방에 모여서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과일을 거의 다 먹어가고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도 그 전까지 그 방을 종종 찾아와서 남아 있는 과일 양을 확인하던 상훈이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손에서 피를 흘리면서 유민이가 문밖에 서 있었다. 손가락을 바늘 같은 것에 심하게 베인 상태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필 선생님들과 숙소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해서 당황스러웠지만 우선 지혈을 시키고 지혁이형, 은섭이형, 윤석이, 진하 등의 도움으로 응급처치 기구들을 구해서 간단한 드레싱을 했다.


돌아와 씻고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