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3. 23일(월)

무료진료 첫날이다.

 

전날 밤에 배낭을 꺼낼 틈도 없이 돗자리에 쓰러져 잠들었다. 잠들기 직전에 6시로 모닝콜을 맞추어 두었는데, 모닝콜이 울리기 전 새벽에 추워서 잠에서 깼다. 일어나 씻고 모여서 봉사대 책자에 있는 말씀을 읽으면서 아침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 아침 식사를 했다. 이날은 내가 식사당번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 캐리어에 담아왔던 콩자반과 양파 절임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은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기 전에 반찬들을 모아서 한 박스에 넣어 가지고 왔다고 했는데, 당시에 그 공지를 듣지 못했던 것이 여러 모로 아쉬웠다. 뷔페 형식으로 반찬들을 꺼내놓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라오스에 와서도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처음에는 접시 개수가 부족해서 걱정을 했지만, 밥이 일회용 도시락 용기에 담겨 있어 굳이 접시를 가져올 필요 없이 일회용 도시락 용기 뚜껑에 반찬을 담아서 먹으면 되었다. 게다가 식사가 끝난 뒤에는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이 식탁과 반찬통만 정리하면 되었기 때문에 시간도 줄이고 일손도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한국 음식이어서 그런지 다들 맛있게 식사를 했다. 식사하면서 학생들에게 이날의 배치표를 알려주었다. 나는 하루 종일 예진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힘들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힘들지에 대한 감이 없었다.

 

봉사지로 이동해서 전날 밤에 확인했던 위치에 IP공유기를 설치했다. 이날 나누어준 사랑나눔의사회 조끼를 입고 그 위에 SMA 패치를 달았다. 각자 배치된 부서로 이동하기 전에 내과 진료실에 모여서 기도하고 시작했다.

 

진료 첫날이었기 때문에 봉사 시작 전에 개막식이 있었다. 9시 넘어서 행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되었다. 각자 배정받은 위치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전날 얼굴을 확인했던 라오스인 영-라 통역과 함께 예진을 시작했다. 진료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방전의 문제가 있어서 EMR은 중단하고 수기로 전환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나마 수기와 병행했기 때문에 더 큰 혼잡은 빚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예진실은 처음에는 환자가 없어서 한산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환자가 갑자기 몰려와서 병원 안이 혼잡해졌다. 원래의 계획은 접수를 마친 환자들이 건강교육을 받으면서 대기하고 있다가 진료소에 자리가 생기면 몇 명씩 데려와서 예진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차트를 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번호 순서와 무관하게 진료실로 몰려들었다. 몇 명의 환자들만 진료실 안쪽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진료실 정문을 잠가 두었으나, 진료실 정문에 있는 창문에 유리가 없이 뚫려 있어서 환자들이 창문 안으로 손을 넣어서 잠긴 문을 열고 예진실로 들어왔다. 김형준 선생님과 한여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환자들에게서 차트를 걷어다가 번호 순서대로 이름을 불러주어서 임시적으로 대처했지만 혼잡은 피할 수 없었다.

 

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지치고 화가 났지만, 막상 예진을 하면서도 이름만 적혀 있는 차트를 보면서 울컥했다. 성별, 나이, 활력징후 등을 접수에서 물어보고 측정해서 기록해 주었더라면 환자가 몰려드는 속도가 조절되어 예진실 내의 혼잡이 덜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진을 하면서 내가 모든 환자에게 나이를 물어보고 성별을 적을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힘겨운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 식사를 하면서 잠시 쉬었다. 오전에 문제가 되어서 중단했던 EMR을 점심 식사 후 쉬는 시간에 고쳤다.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핸드폰에서 EMR에 접속할 수 있도록 수정했던 부분이었다.

 

점심 식사 이후에도 오전과 마찬가지로 예진을 했다. 직원 분들과 현지 인력의 도움을 받아 진료소 정문을 열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으니 출구로 사용하는 진료소 양 옆 문으로 환자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무질서함과 혼잡함에 화가 났지만 나중에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주변에 계시던 김형준 선생님과 한여울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나마 힘을 냈다. 사실 이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진료소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질서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이러한 현상 뒤에는 그들의 절실함과 필요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무질서하고 혼잡한 모습도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직 질서와 예절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데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 환자들이 착하고 순박하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진료가 늦어지는 상황에서 기다리라고 한 마디 하면 그 말에 따라서 아무 불평 없이 계속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 진료가 마칠 시간이 될 때까지 남아 있는 40명정도의 환자들에게는 내일 진료의 우선권을 주겠다고 하고 이름을 적고 별표 스티커를 주어 돌려보냈다. 차트는 병원에 보관했다. 예진을 마치고 나니 문제가 일단락 된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일부터 또 다시 예진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잘 된 점과 개선할 점을 적어야 하는 피드백 용지를 김형준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 도무지 잘 된 점을 적을 뻔뻔함이 없어 고민하면서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이동했다.

 

기분 탓인지 이날 준비된 저녁 식사는 너무나 맛이 없었다. 나는 채식을 하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었지만 고기반찬에 들어간 향신료가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고 했다. 그나마 나는 조미료 냄새는 조금 났지만 야채반찬이 있어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다해갈 즈음 계란오믈렛이 제공되었다. 어제 저녁에 이어 유진이가 내 왼쪽 자리에 앉았는데, 내가 계란오믈렛을 먹을 동안에는 구경만 하다가 내가 남은 계란오믈렛을 옆 테이블에 다 주려고 하니까 그제서야 오믈렛을 달라고 얘기해서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식사 중에 진하의 밥을 너무 많이 덜어 먹어서 핀잔을 듣기도 했다.

 

식사 후에 피드백을 하다 보니 오후에 EKG실에 있었던 진하와 지혁이형이 오후 내내 나 때문에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하는 EKG 기계에 과부하가 걸려서 멈춘 잠깐 동안에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고 했다. 지혁이형은 다리 통증을 주증상으로 호소한 할아버지를 예진 후에 심전도를 찍으러 보낸 것을 보고 울컥했다고 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을 지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날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어지럼증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기립성 저혈압으로 의심되는 증상이 있었는데,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언제 어지러운 증상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고 그냥 심전도를 찍으러 보냈기 때문에 심전도실에 과부하가 걸렸던 것이었다.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는 고령 환자인 경우에만 심전도를 찍기로 해서 EKG실의 과부하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예진실의 과부하 문제는 접수에서 소아 환자를 비롯한 몇몇 환자들의 경우 예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진료실로 환자들을 보내어 해결하기로 했다. 피드백이 마친 후에는 백과장님의 특강을 들으며 라오스 보건사업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식당에서의 일정이 마친 뒤에는 학생 숙소로 이동했다. 밤 9시 이전에 숙소에 도착하면 소그룹을 하고, 그 이후에 도착하면 소그룹을 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날 도착한 시각은 아슬아슬하게 9시가 지난 때였기 때문에 소그룹 대신에 단체로 예배를 드렸다. 말씀은 현정이 누나가 준비했는데,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환자를 만났을 때에,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기도를 해주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았다. 이날 내 능력의 한계를 만났을 때에 내가 대처한 모습이 생각났고, 내 모습과 현정이 누나의 모습이 대비되어 부끄러움과 함께 깨달음을 얻었다.

 

예배가 마친 이후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찬양을 드렸다. 강기훈 선생님, 조현정 선생님, 강하라 선생님들의 곡에 대한 해설과 윤석이의 기타 반주가 어우러져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노트북을 가져와서 배치표를 작성했고, 배치표를 다 작성한 후에는 함께 찬양을 했다.

 

방에 와서 다음날 진료에서 혼잡이 벌어지지 않을 방법을 강기훈 선생님과 윤석이와 함께 이야기 나누다가 어느 새 잠들었다. 다행히 이날은 침낭 안에서 잠들었다.

One thought on “후기 #3. 23일(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