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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6. 26일(목)

무료진료 마지막 날이다. 새벽에 눈을 뜰 때까지만 해도 이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꿈에도 몰랐다. 또한 핸드폰을 숙소에 그냥 두고 나온 것을 아침식사 후에 병원으로 이동하던 도중에 깨달을 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다.


이날은 전날과 달리 방문진료가 없어서 인원을 배치하기에 수월했다. EMR을 사용하는 것은 전날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전에 예진으로 시작했지만 도중에 조수현 선생님과 역할을 바꾸어 내과 진료보조를 하게 되었다. 진하는 박병원 선생님의 진료보조를, 나는 강기훈 선생님의 진료보조를 맡게 되었다. 강기훈 선생님께서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셨다.


사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나와 강기훈 선생님 뿐만이 아니었다. 전날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다형이는 결국 처음 배치된 약국 대신에 남자 물리치료실로 부서를 옮겼다. 나중에 듣기로는 다형이가 수액을 2L나 맞았다고 했다. 또한 봉사 기간 내내 부지런히 돌아다니시던 김형준 선생님이 안 보이셔서 어디 계신가 궁금해 했는데, 나중에 보니 몸이 안 좋으셔서 물리치료실에서 누워서 쉬시고 계셨다.


강기훈 선생님의 오전 진료는 오후 1시까지 계속되었다. 배고프고 지친 상태로 이곳 병원에서의 마지막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편식 채식을 하시는 자연 누나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했다. 이날은 웬일로 고기가 들어간 반찬 대신에 두부가 들어간 반찬이 제공되었다. 덕분에 식사를 다른 날보다도 더 맛있게 할 수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수현이의 부탁으로 인터뷰를 촬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동영상 촬영을 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장소를 옮겨서 재촬영 하기로 했다. 인터뷰 장소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진료실 복도를 지나가던 중에 오 이사님과 라오스 환자가 물리치료실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진료실 밖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다 보니 물리치료실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은 오 이사님과 라오스 환자가 아니라 윤선이 누나와 유진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후에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강기훈 선생님의 진료보조를 하게 되었다. 오전과의 차이점은 박병원 선생님께서 내과 진료실에서 자리를 옮기셔서 남자 물리치료실에서 진료하시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물리치료실에서도 무선 인터넷이 접속되어 처방전 인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부인과 진료실과 마찬가지로 인쇄된 처방전을 가지러 진료 보조 학생이 내과 진료실을 오가야 했다.


이날 오후 진료는 오후 3시까지 하기로 했다. 진료가 마쳐갈 즈음에는 처방전을 인쇄할 종이와 잉크가 거의 다 떨어져서 초조했다. 결국 종이는 다 떨어졌고 사용하지 않은 진료차트를 이면지로 사용하여 처방전을 인쇄했다. 다행히 마지막 처방전을 인쇄할 때까지 잉크는 끊기지 않았다.


진료를 마친 뒤에 짐 정리를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다. 폐회식을 마친 뒤에 다시 돌아와 짐 정리를 하기로 하고 몇 명씩 차를 나누어 타고 폐회식 장소로 이동했다. 폐회식 장소는 마을회관 같은 곳이었는데,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테이블에 흩어져 앉았다. 선생님들은 보다 앞쪽 테이블에 모여 앉으셨다. 나중에 출발한 팀들이 속속들이 도착해서 자리에 앉았다. 내 양 옆에는 진하와 다형이가 앉았다.


테이블에는 몇몇 음식과 장식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닭대가리였다. 과자들도 있었는데 대개 새우가 들어가 있어서 우리들이 먹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 외에는 삶은 계란과 몇몇 과일이 있었고 처음 보는 기구들이 있었다.


폐회식이 시작되고 라오스 씨엥쾅주의 ‘지도사’의 인사말과 최대로 선생님의 말씀을 비롯하여 이런 행사에 으레 포함되는 순서들이 진행되었다. 폐회식에 참석한 마을 주민들의 규칙적인 박수 소리를 들으며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상기하게 되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진하는 배터리가 다 떨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추가 배터리까지 준비해 와서 셀카를 찍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챙겨오지 못한 어리석음을 자책하면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인사말들이 끝난 뒤에는 봉사대원 한 명씩 나와서 도지사로부터 표창장을, 병원장으로부터 선물을 전달받았다.


그 이후에는 라오스 고유의 환영 의식이 시작되었다. 샤먼으로 보이는 사람이 앞에 나와서 한참 동안 주문을 외우더니 끝에는 쌀을 뿌려대서 깜짝 놀랐다. 그런 뒤에는 술을 마셔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들 양해를 구하고 사양했다. 그런 뒤에는 서로의 손목에 실을 걸어주면서 축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여러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맞아서 당황스러웠다.


그런 뒤에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테이블에 놓여져 있던 닭과 과자들이 치워지고 대신에 마을 사람들이 파트락 형식으로 준비해온 음식이 차려졌다. 참새고기 등을 보고 비위가 상한 나는 주로 람부탄과 망고만 먹었다. 그것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았는데 진하가 초콜릿을 나누어주어서 맛있게 먹었다. 진하의 준비성에 놀랐고 고마웠다. 장염에 걸려서 물만 마시고 있던 다형이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폐회식이 마친 다음에는 또 다시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이동했다. 매일 저녁마다 식사를 했던 식당에 이날 저녁에도 식사를 하기로 예약을 했었는데, 예약한 것이 취소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 앞서 과일만 먹었던 나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로 느껴졌다. 그곳에서 나, 진하, 유진이 등 몇몇 사람들만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 동안의 봉사활동 사진을 슬라이드 쇼로 보여주었는데, 이날은 다들 식사를 하지 않으니 사진에 집중했다.


식사 후에는 종이로만 피드백을 하고, 늦은 감이 있지만 그 동안 수고해주신 직원 분들과 통역 분들을 소개하고 둥글게 서서 복음성가를 불러주었다. 통역 분들도 라오스의 ‘이별의 노래’를 기타 반주와 함께 들려주었다.


통역 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남은 짐들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병원으로 이동했다. 물품들의 목록과 수량을 확인하고 박스를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당장 다음 날 아침까지 진료 통계를 산출해야 하는 상황을 맞아 나는 짐 정리에 참여하지 않고 차트 정리를 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짐 정리 작업이 끝난 뒤에는 다같이 진료실에 모여 서로 사진을 찍으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이 때에 나는 아침에 핸드폰을 챙겨오지 못한 것을 두 번째로 후회했다.


짐 정리를 마친 뒤에는 숙소로 이동했다. 나는 숙소에서 차트 정리를 위한 프로그램을 완성하고 뒤늦게야 김범태 기자님께서 준비한 사진전을 보러 갔다. 사진들마다 이야기가 있었고 감동과 즐거움이 있었다. 내가 나온 사진 중에는 전날 정전되었을 때에 산부인과 진료실의 조명 역할을 하던 일명 ‘용감한 녀석들’ 사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참고로 그 사진은 스무 번 넘는 반복 촬영 끝에 얻어진 작품이다.


사진전이 마친 뒤에는 전날에 이어 강기훈 선생님의 사랑학 각론 시간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그 동안의 봉사 기간 동안의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폐회식과 짐정리, 사진전 등을 거치면서 지쳐 있어서 강기훈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노트북을 이용하여 좀 전에 만든 차트 정리 프로그램으로 최대로 선생님과 함께 차트 정리를 했다. 사랑학 각론은 좋은 시간이었지만 길게 진행되지 못하고 일찍 끝나서 아쉬웠다.


사랑학 각론 시간이 끝난 뒤에는 의대 고학년인 구원 누나와 윤선이 누나가 차트정리에 합류했다. 그러나 일손이 부족해서 금방 끝나지 않았다. 결국 자고 있던 진하를 깨워서 데리고 와서 함께 차트 정리를 했다. 도중에 최대로 선생님께서는 먼저 쉬러 가셨다. 나머지 사람들은 새벽 3시까지 남아서 700여명의 환자 자료를 입력했다. 다들 너무 고생해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한국에 돌아오면 이들에게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결국 새벽 3시가 되자 체력의 한계를 만나 다들 자러 돌아갔다. 남은 환자 300여명의 자료를 입력하다 보니 날이 밝았다. 중간중간에 생전 보지 못했던 거대한 곤충들을 화장실에서 만나서 잠이 확 달아났다. 새벽 6시쯤에는 일찍 일어난 현정이 누나가 구경을 오시기도 했다.


결국에는 모든 입력 작업을 끝냈다. 아침에 눈을 뜬지 24시간만에 잠자리에 들었다.

후기 #5. 25일(수)

전날도 일찍 잠들었기 때문에 이날은 일찍 일어났다. 샤워를 하면서 아침을 준비했다. 아침예배 후에 식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부서배치를 알려주었다.

 

이날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기술이전 세미나와 방문진료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학생들을 배치했다. 오전에는 강기훈 선생님이 방사선 영상에 관한 기술 이전 세미나에 강연을 하러 다녀오시게 되었다. 방문진료의 경우에는 몇 가지 사정이 있어서 배치표와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결국 방문진료에는 강하라 선생님, 김영선 선생님, 지혁이 형 그리고 주향이 누나 등 면허가 있는 대원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병원에 남아 오전에는 예진을 하고 오후에는 내과진료보조를 하기로 했다. 예진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조범수님과 함께 진행했다. 전날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조범수님의 통역이 훌륭해서 힘들지 않게 오전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다.

 

전날과 달랐던 점 중 하나는 봉사 첫날에 문제가 있어 중단했던 EMR을 다시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약국에서 처방전을 인쇄하는 것은 거리가 멀어 포기하고 진료실 내에서 처방전을 인쇄해서 환자에게 주면 환자가 자신의 차트와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에 가서 약을 처방 받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오전에는 시험적으로 조현정 선생님 진료실에 노트북과 프린터를 설치해 두고 산부인과 환자를 대상으로만 사용했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오전 봉사활동을 무사히 마치고 점심식사를 한 뒤 남는 시간에는 물리치료실에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오후부터는 조현정 선생님 뿐 아니라 강기훈 선생님과 박병원 선생님께서도 EMR을 사용하시기로 했기 때문에 프린터와 네트워크를 설정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산부인과 진료실에 설치되어 있던 프린터를 내과 진료실로 옮기고 강기훈 선생님 노트북과 연결했다. 설치된 프린터를 네트워크로 공유하여 다른 노트북에서도 강기훈 선생님 노트북을 통해 인쇄가 되도록 했다. 산부인과 환자들의 처방전의 경우에는, 산부인과 진료 보조 담당이 내과 진료실에 찾아와서 인쇄된 처방전을 받아가기로 했다.

 

곧이어 오후 진료가 시작되었고, 나는 내과 진료실에서 박병원 선생님의 진료를 보조하면서 EMR도 관리했다. 본과 3학년 때에 병원에서 내과 실습을 할 때에는 주로 입원 환자를 보았고 내과 외래를 참관할 기회는 드물었다. 이번에 박병원 선생님의 외래 보조(실제로는 참관)를 하면서 내과 외래가 이렇게나 체계적이고 흥미롭다는 점을 처음으로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혈전이 있는 환자였는데, 초음파 상에서 좌심실 첨부에 커다란 혈전이 뚜렷하게 보여서 신기하기도 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오후 진료 도중에 단체 사진 촬영을 하러 모이기도 했다. 이날이 마지막 진료일은 아니었지만, 다음 날에는 진료를 일찍 마치고 폐회식에 참여해야 해서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는 이날에 사진 촬영을 하게 되었다.

 

오후 내내 EMR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IP공유기와의 무선 연결이 가끔씩 끊어지는 문제가 있었지만 이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 드물지 않게 병록번호가 중복된 환자가 있어서 하나의 처방전 안에 다른 선생님의 처방이 잘못 포함된 경우가 있었는데, 그 경우에는 잘못된 처방을 수작업으로 지우기도 했다.

 

그러나 진료가 끝나갈 즈음에 EMR을 중단하고 수기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정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EMR 중단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초음파 검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고, 창문이 없는 산부인과 진료실에서는 조명이 없이는 진료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였다. 전원이 몇 분 안에 들어올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 때까지는 내 핸드폰의 플래시를 조명으로 사용하여 산부인과 진료를 보조하기로 했다. 그러나 20분이 넘게 지나도록 정전이 지속되었고, 결국 조수현 간호사님에게 조명 역할을 넘겼다. 진료가 마칠 때까지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은 매일 저녁마다 가던 식당이 아니라 첫날 점심에 국수를 먹었던 식당에서 먹었다. 이날의 저녁식사비는 김범태 기자님께서 내셨다. 국수를 먹는 동안에 일부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과일을 사러 시장에 다녀왔다. 최대로 선생님께서도 많은 돈을 보태주셔서 저녁식사 시간에 다양한 과일을 맛볼 수 있었다.

 

식사 후에는 저녁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숙소로 이동했다. 이날은 특별히 소그룹 시간 이전에 강기훈 선생님의 사랑학 개론이 있었다. 독신의 은사는 아무나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다. 끝날 무렵에는 자신의 이상형이 어떤 사람인지 등을 쪽지에 적어서 제출했다. 내 옆 자리에 비몽사몽인 상태로 앉아 있던 예은이의 쪽지는 내가 대필해 주었다.

 

이후에는 각 조로 나뉘어 짧게 소그룹을 했다. 이날 처음으로 저녁 프로그램에 합류한 김범태 기자님께서 방들을 돌아다니면서 소그룹 장면을 촬영했다. 촬영을 마친 뒤에도 소그룹 시간은 계속되었고, 김범태 기자님께서는 우리 소그룹에 합류하셨다. 기자님이 어떻게 기자가 되셨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에 대해 듣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기자님의 연세도 알게 되었는데, 동안이셔서 깜짝 놀랐다.

 

소그룹이 마친 후에는 방으로 돌아왔다. 몸 상태가 나보다 더 좋지 않은 다형이가 강기훈 선생님께 치료를 받으러 온 것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진하정의 라오스 봉사대 사족 99% 후기 3

안녕하세요!

진하정입니다 ^-^

 

2. 진료보조

목요일, 봉사 마지막날 저는 진료보조를 맡게 되었습니다! 내심 ‘최대로 선생님 진료보조를 하면 좋겠다~’ 했는데, 선생님은 진료보조를 받지 않으시더라고요.(ㅠㅠ) 내년에 혈액종양 내과 실습돌 때 선생님 뒤를 총총 쫓아다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곳은 우울한 도시 Wonju..ㅠㅠ

 

대신 뉴페이스 딸라쎄미 박병원 쌤의 진료보조를! > < 아마 저의 오늘 후기는 선생님 찬양 찬양이 될 듯한 기운이ㅋㅋ

이제야 제가 진료보조를 할 수 있다니!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진료보조가 어떤 것인지 잘 몰랐고, 난 아는 것도 없고, 선생님께 도움이 안될텐데.. 라는 걱정. 그래도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선생님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참고로 박병원쌤은 작년까지 3년간 라오스에서 코이카로 봉사하셨기 때문에 라오어를 잘 하셔서 무통역의 위엄이그렇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으로는 또하나의 걱정이 생겼어요.ㅋㅋ  ‘망했다. 선생님은 한국말을 안하셔나는 아무것도 못알아듣겠지, 또 졸면 어쩌나ㅠㅠ

 

진료가 시작되고, 저는 그냥 듣는 척은 해야지 하며 환자와 선생님의 대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냥 라오어를 능수능란하게 하시는 선생님을 신기하게만 쳐다보았죠‘0’

그런데 선생님께서 환자와의 대화 사이사이에 어떤 환잔지, 어디가 아퍼서 왔는지, 이럴때는 어떤 약을 처방을 해주는지, 깨알 같은 유머와 함께 얘기를 해주시는 것!!!ㅠㅠ(환자가 한국말을 알아들으시지 못해서 할 수 있는 유머..ㅋㅋㅋㅋ) 라오스에서 중간 중간 핸드폰에 메모를 했는데 이날은 이런걸 써놨더라고요. “, 선생님 너무좋다♥.♥ 담에 또 만나면 좋겠다…등등..말이 진료보조지 이것은 아마 병원 실습 때 받는 티칭이 이럴거 같아요ㅋㅋ 제가 아직 병원 문턱에도 못 가봐서 정확히는 모르지만요ㅋㅋ

그날 제가 선생님께 배운것에 대해 조금 써볼게요.ㅋㅋㅋ

, 그러고 보니 조유미 선생님의 지시아래 한 환자의 Physical examination도 했어요. 폼을 잡아보긴 했는데.. 저는 그때 무엇을 듣고 있었을까요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조유미 선생님께 정상인 것 같은데요…”라고 하긴 했다만…….. 무슨 생각으로 정상이란 말을 내뱉었는지..ㅠㅠ ㅋㅋㅋㅋ

 

여튼

박병원쌤과의 진료보조로 돌아가서~

선생님께서는 청진음을 많이 들려주셨어요. 절차는 이렇습니다. 우선 선생님께서 스스로 소리를 확인하시죠. 그다음, 환자 몸에 대는 부분을 선생님께서 그대로 유지하시면서 제게 헤드셋(?)을 건네주셔요. 제가 얼마나 감사, 감동했겠습니까……ㅠㅠㅠㅠㅠㅠ 날아갈 것 같은 마음 꾹꾹 누르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아 내리며 열심히 들었어요.

이런 감사돋는 환경 속에서 제가 들은 것

정상 심음, 호흡음

-asthma환자의 expiratory wheezing (이이~하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해요 글로만 보던 소리를 듣다니 신기방기)

-rale, crepitation (두 가지 용어를 모두 사용하셨는데 같은건가..ㅋㅋㅋㅋㅋ;;;)

-subsegmental atelectaxis (로 추정되는 부분?)

-Bradycardia junctional escape rhythm (EKG찍은 거랑 같이 들려주신걸로 기억)

-등등…

그리고 저 포함 충남대 박모양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두근두근 이경보기!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이것이, 얼마나 저희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설명하면 제가 넘 부끄러워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할게요.ㅋㅋㅋㅋ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ㅋㅋㅋ

 

그리고 초음파실도 여러번 갔어요!!

정상 심장을 여러 axis로 모두모두 설명해 주셨고.. (.. 제가 4월에 심장학을 했는데 초음파 axis 마저도 기억이 나질 않더라구요….OTL)

그외 간, 담낭, 담도, 비장, 신장 등등등 여러 장기의 정상 초음파 소견을 보여주셨어요.. 초음파 하는 환자들마다 매번 설명해 주셨는데,… 제 기억력이 천해서..ㅠㅠㅠ

심장에서 기억나는 것은 atrial fibrillationㅋㄷ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정상과 비교해서 쫌 엉망으로 뛴다는 느낌이ㅋㅋㅋㅋㅋ;;; 커진 Left atrium을 보았구요..ㅋㅋㅋㅋㅋㅋ;;;;;

한글자 한글자 정말 부끄럽네요.. 아는 것도 없으면서…..ㅋㅋㅋ;;

쓰는 것 자체가 저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인데 그냥 쓰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선생님 대박이죠..ㅠㅠ♥

 

오전진료가 거의 끝나가고 점심시간이 되었어요. 선생님께서 제게 점심을 먹으러 가라고 여러번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냥 계속 앉아있었어요. 사실 말없이 듣고 보기만 하니 그다지 배고프지도 않았고, 그냥 선생님옆에 있는 게 좋았다는….. ♥.♥

 

저는 원래 진료보조가 오전에만 있었어요. 오후에는 예진을 봐야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저의 마음을 읽으신걸까요. 최대로 선생님께서 “정진하 너 오후에도 진료보조 해라!” 라고 말해주셨어요!

!!!!!!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저 정말 다른데로 가고싶지 않았었거든요~

또다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자제하며 계속하여 진료보조를~~

점심식사를 하시고 선생님께서 작은 페트병에 가루커피를 타 드시며 잠시 행복을 만끽하시더라고요.

전 옆에서 조용히 보고 있었는데..

내심 제게 한입 권하시지 않을까 하는 작고도 큰 희망을 가지고……………

그런데 끝내 권하시지 않으셨더라는………ㅠㅠㅠㅠ

나중에 학생들과 나눈 얘긴데 그 커피는 치과 임군의 VIA커피였고, 하루 전에 진료보조를 섰던 박모양에게는 권하셨……………….. 그소리듣고 그 자리에서 무너짐. KO. 인정

 

오후에는 배치가 조금 바뀌어서 선생님은 남자 EKG실로 이동~

갑자기 산부인과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했어요. 전 또 정신 못 차리고 본분을 망각한 채 거기에서 한눈을 팔고 있었다는…. .. 선생님 너무 죄송했어요.. 제가 왜 그 방에서 한눈을 팔고 있었을까요..여튼 산부인과에 있는데 박병원 선생님께서 당 체크를 해줘야 한다며 저를 찾으셨죠. 정신차리고 다시 가서 진료보조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선생님께 의원??? 여튼 그 동네의 높은 사람들이 오셨어요. 세분이 같이 들어오셔서 제 자리도 뺏기고.. 옆에 쭈뼛쭈뼛거리며 서있었습니다. 자리가 멀어지다 보니 그 시간동안은 선생님의 깨알 설명을 못들었고.. (조금 지루했어요ㅠㅠ그분들도 초음파 하러 가셨는데, 다은이가 환자 EKG를 찍는거 도와달라고 해서 그랬었나여튼 그래서 못따라갔어요..ㅠㅠ 선생님께서 돌아오시면서 그 환자에게 뭐가 있었다며 못 보여줘서 아쉽다고 하셨는데.. 저도 정말 아쉬웠는데뭐였는지는 기억이……;;;;^^;;;;

이렇게 진료보조도 끝나고, 봉사도 끝났습니다. 봉사일정의 마지막을 훈훈하게 마무리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어요. ^^

 

쓰다 보니 또 후기가 길어졌네요…ㅋㅋ

 

박병원 선생님 정말 대박이죠!!!!!!!!!!!!!!!ㅋㅋㅋㅋㅋㅋ 아마 이런 티칭은 다시는 못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선생님께 너~무 감사했고, 많은 환자를 보시느라 힘드신데 계속 미소 지으시며 환자를 만나신 모습에 감동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라오스를 사랑하시는 듯 ~

제 글을 박병원 선생님께서 과연 보실까요? (손발이 오글거려서 안보시면 좋겠어요…..ㅋㅋㅋ  그래도 자랑은 하고싶었다는..ㅋㅋ)

 

이제 스마인들 모두 개강한 것 같아요.

2학기동안 다들 정신없겠지만

힘들때마다 라오스를 추억해보아요~ㅋㅋㅋ

라오스의 기운으로 사바이디~ 사바이디~

 

모두 깽행!

 

 

선생님이 되어 쓰는 후기4 – 봉사 둘째날

전 내일부터 일을 시작해서….. 그 이후 내용은 잘쓸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게 젤 많이 쓴(진도로만 보면.. 봉사날까지 후기쓴게 거의 처음??ㅋㅋ) 후기라는 거~~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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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사 둘째 날

피곤함 속에 시작한 둘째날.
둘째날의 아침 예배는 현지 통역을 맡은 청년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 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다. 라오스에 가기 전부터 라오스는 사회주의의 나라이며 90프로가 불교, 나머지에서도 아주 소수가 기독교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라오스 나라 속에서 하나님을 믿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현실은 봉사 마지막날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암튼 기독교인 특히 재림교인으로서 라오스에서 믿음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수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말하는 현지통역보다 전해주는 서준이의 리액션이 빵빵 먹히면서……. 민서준신학대보내기 캠페인이 벌어질뻔 했다.ㅋㅋㅋㅋ 

반쯤 안개와 반쯤 구름낀 야외식당에서의 오카리나 연주는….. 눈으로 음식을 보고 귀로 연주를 듣고 입으로 먹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분위기있게 들릴 연주였지만…… 밥 다먹었다고 카메라를 들고 동영상으로 촬영한 나에게는 갈수록 이글어지는 하라오빠의 표정에…..  음.. 오빠 미안해 ㅋㅋㅋ  혹시 그 연주가 다시금 듣고 싶은 사람들은 연락주세요 ㅋㅋ

암튼 살짝 내리는 비를 맞고 우리는 병원으로 출발했다.

이날은 아침부터 강기훈 선생님 방문진료 나가시고 현정언니는 세미나를 가는 바람에 나도 진료를 하게 되었다. 이날 부터 난 쭉 ㅜㅜ 진료를 하게 되었다. 아~ 진료를 안하던 나날들이여ㅜㅜ 환자들은 다양한 근육통, 위염, 어지럼등등의 증상을 호소했고. 내가 줄 수 있는건 물리치료, 진통제, 소화제/위보호제 밖에 없었다. 현정언니는 손잡고 기도한다는데….. 나는 부끄럽지만 잘 낯선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 정말 쉽게 되지 않는 일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국에서 조차도…. 그래서 나는 미소 하나만.. 그들에게 줄 수 밖에 없었다.

그 전 봉사대….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그렇다고 다른 선생님들이 기억에 안 남는 건 아니예요~ 사랑해요 선생님들^^ )중 하나이신 진석준 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굴이시기도 하지만, 가장 힘든 시간인 오후 4시에도 환자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셨던… 그 모습이 기억나기에 나는 처음 환자를 대할 때, 미소로 대했다. 

현정언니가 세미나를 떠나고 난뒤 잠시 조용했던 진료장이 잠시 부산해지더니 갑자기 나를 부른다. 산모가 왔단다….. 나보고 어쩌라고;;; 난 산부인과 인턴도 안 돈 내가….. 다행히 조산사가 있었다. 난 어리버리 하고 있는 사이 김영선 간호사님과 조산사가 분주히 움직이고 계시기에… 조용히 물러나와 진료를 보았다. 근데 아무리 봐도 양수 색이 안 좋아서….. 뭔가 불안했는데 어떤 항생제를 주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현정언니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 그 유명한 종이컵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고(응?) 이건 그날 저녁까지 계속 회자되었다… 그리고 현정언니가 와서 그 산모는 마무리 되었다.. 

이날 오후에도 산모가 왔다. 이전 봉사대에서  이런 적 없었는데 산부인과 의사왔다는 소리에 왔자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두 아이 모두 현정언니 없을 때 애를 놓았다는거… ㅎㅎ 그 오후에 온 산모는 현정언니가 몇차례 갔지만 결국 새벽에 애를 놓았다.

다사다난 했던 하루가 가고.. 저녁시간.
그날은 박병원선생님께서 강의를 하셨다. 그 첫인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안녕하세요. 전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시작한 첫 인사에 우리 모두가 감명을 받았다. 박병원 선생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라오스에서 어떤일을 하셨는지, 책에서는 간단하게 나온 탈라세미아에 대한 이론적인 내용까지.. 

그리고 이어진 소그룹..
많이 아쉽긴 한데 심화반이었던 우리반은 소그룹사이에 차이가 많이 벌어진다기에 멤버를 조금 바꾸어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그래도 우린 우수반 ㅋㅋㅋㅋㅋ 늦은 시간에 시작해 다들 감기는 눈 부릅뜨며 예배를 드리고 각자 방으로 헤어졌다. 어김없이 막히는 샤워실과의 사투를 벌이며 그날 하루를 마감했다.

<후기4 월요일 > 이 사람들이 대체 누구인가?

프롤로그

 

나는 이제 피가 뿜어져 나오는 드라마의 수술 장면을 예전 보다는 길게 지켜 볼 수 있다. 그리고 의료에 관련된 드라마도 넘 재미있다. 가장 큰 변화는 피가 더 이상 공포 스러운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유식해 졌다는거…. 

‘골든 타임’의 심전도 장면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제대로 촬영을 했나.. 검사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웃었다. 하하하..^^

 

진료 시작 월요일.

 

월요일의 반찬을 담당한 친구들이 아침 식사를 도와 주었다. 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만화 주인공… 을 닮은 한 학생이ㅋㅋ 어머님이 직접 요리해 주신 반찬의 국물이 새었다서 두통의 반찬을 가져 왔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나 그 반찬이 없었다면 우린 슬펐을것이니, 그냥 괜찮냐라는 말로 ‘급’ 마무리 했다.ㅋㅋ

  

전용 오픈카를 타고 병원으로 모였다.

도착하자 기도를 위해 우리는 병동으로 모였다.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이기에 조용히 방안에서 문을 닫고 기도했다. 마음이 좀 이상했다. ‘문을 닫고 기도 하다’…… 마음이 갑자기 간절해 졌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선한 행실 인데 우리의 이기적이고 못된 자아가 불평 불만을 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슬그머니 겁이 났다.

 

치과에서의 스켈링 보조

짧은 환영식?이 끝나고 치과로 모였다.  상훈이는 아주 명확하고도, 체계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소독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기본 밥상?을 차리고, 소독을 3단계에 거쳐서 하고, 그리고 마취제 주사 셋팅과, 스켈링 팁?을 끼우는 방법 그리고 락스랑 또 하나… 식염수?? (기억이 가물 가물 ㅠㅠㅠ)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알려 주었다. 최근 몇 년간 그렇게 집중해 보기는 처음이였다. 드디어 시작.

 

상훈이의 스켈링 보조를 하게 되었다. 나의 역활은 셕션을 하면서 라이트를 비춘다…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간결한 문장이 실제로는 온몸의 신경과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임을 시작할땐 상상도 못했다.

 

첫 환자는 어린 여학생이였다. 나 처럼 겁이 났는지 쉬이 입을 벌리지 않아서 통역과 우리가 ‘아’를 한 백번 한 것 같다…. 드디어 아이가 입을 별렸다. 상훈이는 실제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평소와 같은 신중하고도 차분한 모습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셕션을 영어 단어로 배운 나……..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거기에 공간 감각력이라고는 없고, 순발력도 없는 내가 상훈이가 보는 공간이 어디인지 도대체가 알 수 가 없었다. 점잖은 목소리로 상훈이가 ‘누나 거기가 아니라 여기요’ 하고 여러번 알려줬다는 것 말고는 첫 환자에 대한 기억이 없다. 두번째 환자도 나는 셕션 팁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몰라 상훈이를 쳐다 보기 일쑤였고, 나의 라이트는 환자의 치아가 아닌 엉뚱한 상훈이의 손등을 비추기를 여러번 했다. 거기에 피까지…… 셕션팁을 신경쓰니 라이트가 엉뚱한데로 가고, 라이트를 보잖이 상훈이가 뭘 보는지 모르겠고..ㅠㅠ 그렇게 두번째 환자가 끝났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땀이 비오듯이 온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문자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였다. 마음에서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하나님 셕션과 라이트 두가지 모두를 잘하기는 힘들것 같으니 하나만이라도 잘하게 도와주세요.’ 숙였던 허리를 펴고 주변을 살펴 보았다. 모두들 환자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이 않나지만.. 아마 소은이였을 것이다. 너무나 진지하고도 열중하고 있는 모습에 용기가 생겼다. 나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든 일이구나… 환자에게도 낯선 사람, 낯선 치과 기구로 치료를 받는 것이….. 심지어 의사 선생님들도 불편한 의자와, 배드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모두에게 힘들지만,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열정을 바치고 있음을  순간 느꼈다.

 

세번째 환자가 왔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차분히 상훈이가 가르쳐 주는 데로 보이지 않는 치아는 라이트로 미러를 비추고 시야가 확보되는 부분은 라이트로 직접, 그리고 셕션은 방해가 되지 않게 반대쪽으로…. 상훈이가 ‘누나 이제 잘하는데요?’ 라는 짧고도 굵직한 멘트를 날렸다. 자신감이 좀 붙었다. 나는 오로지 라이트가 잘 비취지는 것에만 집중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나나를 찾았다. 식사가 왔다며…

 

그때의 기분이란 순간 ‘다행이다’ 이랬다…. ㅋㅋ.  내가 하던 역활을 잠시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배달된 식사를 챙기러 갔다. 세팅을 하니, 12시쯤 식구들이 모였다. 맛있게 밥을 먹고 오후가 되자, 나는 다형이와 함께 소독을 하게 되었다.

소독은 스켈링 어시스트보다는 수월했다. 한번에 하나씩 차근차근 하면 되었기 때문에… 그러나 개인적으로 봉사대 최대의 위기를 맡게 되었다.

 

‘악’나즈막한 비명이 나오다 목에 걸렸다. 피가 범벅이 된 발치용 기구들과 치아들이 트레이에 담겨져 왔다. 나도 모르게 속에 메슥거웠다. 나는 액션영화에서 나오는 피 튀기는 장면을 못본다. 때문에 영화관에서 중간에 나오기도 여러번………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어렸을적 기억때문일 것이다.  내가 9살 때 동생이 큰  차 사고를 당했다. 6살이던 어린 동생의 피가 흥건히 적신 아스팔트를 보면서 인간의 죽음이 무엇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나. 하여 나에게 피는 공포의 대상이자, 나를 무력하게 하는 대상이였다.  그래서였는지, 트레이에 피범벅이 된 기구들을 보자 마자 나도 모르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이 찡그려졌다. 얼굴을 돌리니 마스크 너머로 앞에 기다리고 있는 라오스 사람들을 보았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이곳에 개인적인 취향대로 행동하기 위해 온것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온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맡고 있는 역활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내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하지만 생리적인 구토 현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조용히 나왔다. 숨을 돌리고 묵묵히 일을 하던 다형이에게 발치 트레이를 맡겼다. 고마워 다형아… ^^ ㅋㅋ 너 아니였음 누나 그때 좌절 했을 것이다. ㅋㅋ 그 뒤로도 피범벅 발치 트레이가 왔지만 다형이가 다 처리해 줬다는 …. (하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 부터는 피가 덜 무서워 졌다. 그래서 지금은 액션 드라마도 쬐끔 잘보게 되었다는)

 

정리 시간이 되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침처럼 생겼지만 솔처럼 생기고 다양한 색깔의 기둥을 가지고 있으면서 번호가 있는… 뭔지를 모르니까. 하여간 손바닥 만한 통에 들어있는 작은 녀석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순간 점심때 먹은 반찬이 생각나서 그 통과 작은 녀석들을 그대로 두고 옆방을 다녔왔다.  그런데 갑자기 ‘탁’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와 보니 내가 두고온 그 통에 있던 작은 녀석들이 우수수 땅으로 떨어졌다…… 이런……. 나도 모르게 그 통의 주인이라고 생각되어지는 한 분의 얼굴을 살폈다….. 만약 내가 주인이라면 완전…. 화가 났을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그 물건은 치과 기 구중 중요한 기구인것 같고, 개인 물건인 데다가 땅바닥에 한개도 아니고 몽땅 떨어지다니….뒷 골이 땡길만한 일이였다. 그런데 그 의사 선생님은 그저 웃으시면서 ‘큰일은 큰일이다 (웃음)  잘 찾아서 주워담고, *** (잘모름)에 집어넣어서 소독해라’ 하시면 시크하게 나가셨다… 난 넘 쫄아서 죄송하다고 한 마디도 못하고 대신 현장에 있던 같이 있던 친구가 미안해 하며 치웠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런 일은 정말 엄청난 일이였다는거….ㅠㅠㅠ 이자리를 빌려 그렇게 시크하게 나가주신 선생님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

 

 

하루종일 느낀 것이지만, 치과에 ‘치’도 모르는 일반인 우리가 도와주는 것이 그리 탐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아무리 치대라고는 하나 학생들이 도와주는 것이 그리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나퍼? 하여간 그것이 무엇인지 되물어보는 나같이 효율없는 봉사자에게 차분히 설명해 줄 수 있고, 기구가 셋팅이 않되었어도 싫은 기색 없이 잘 기다릴 수 있고, 찾고 있는 기구를 못 찾는 우리를 두고, 직접  와서 다른 기구로 바꾸어 가는 치과 의사 선생님이 과연 몇이나 될까?

 

거기에 하루 종일 말이 안통하는 환자를 상대하고, 하루 종일 서서 의사 선생님 어시스트 하면서, 땀을 비오듯이 쏟아내도 밝게 웃는 임 **군. 머리에는 라이트를 한 손에는 셕션을 다른 한 손에는 스켈링 팁을 쥐고 일인 3역을 하는  스마인들을 만드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하루가 끝나가고 침낭에 누었다. 나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과연 이 일주일의 휴가를 반납하고, 하루종일 이 더운 곳에서 고생을 자처하는

나와 함께한 이들…. 이들이 대체 누구일까????

 

 

너무나 인상적이였던 하루는 나에게 큰 질문을 남기며 끝이 나고 있었다.

 

 

[후기] 천천히 올려봅니다. ㅎ 후기 첫번째(prologue)

prologue(봉사대 가기 전 이야기)

 

이라는 걸 참 오랜만에 써보는 듯하다.

내가 썼던 마지막 글이라면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오기 위한 ‘자기소개서’였고 그때 그 자기소개서를 제외한 다른 글을 썼던 기억은 적어도 최근 몇 년은 확실히 없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 일에 대해 소상히 기록에 남기거나 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모르는 그냥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추억들을 기록에 남겨 본 적도 거의 없는 것 같다.

후기를 쓰기 전부터 주저리주저리 내 이야기를 쓰는 걸 보니 확실히 글 쓰는 것에 자신이 없나보다사진기록과 재미있는 문체와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훌륭한 라오스 봉사대 후기들 사이를 비집고 비루한 글을 올리려니 부끄러워서 이런 쓸데없는 말들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SMA의 신입생!! 귀여운(?) 새내기로서 봉사대 후기 업로드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하지만 역시 많이 늦었다. 글 쓰는게 참어렵다).

 

 

여러번 많은 사람에게 말해서 이제 또 말하기 조금 부끄럽지만 SMA를 좋아한다. 그냥 좋다. 이 모임이내가 소속되기 전부터 좋았고, 소속될 수 있어서 좋았고, 앞으로는 더 좋아할 것 같다. 그래서 매년 SMA에서 하고 있는 하기 봉사대는 무조건 참석하리라고 애초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봉사하러 가는 나라가 어디든, 어떤 사람들이 가든지 상관없이 갈 생각이었다. 3월 말쯤 봉사대 신청을 하라는 회장 윤석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청을 했고 바로 입금했다. 봉사대 가기 얼마 전에 상훈이가 나에게 비행기 값이 입금 되지 않았다는 연락을 한 적이 있다. 그 연락을 받았을 때 돈이 문제가 아니라 비행기 예약이 안돼서 봉사대 못 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나중에 상훈이가 알아보니 입금을 너무 빨리해서 사랑나눔 의사회에서 체크를 못했다고 했다. 41일부터 입금기록을 아무리 살펴봐도 없었는데 나는 3월에 입금을 해 버렸더라고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서서 오바했나보다….

 

 

봉사대 기간이 721일 부터로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고난 방학이 20일 부턴데사는 곳도 경상남도 양산 시골인데 봉사대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은 걱정일 뿐악명 높은 1학년 1학기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허둥지둥 학교생활과 시험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윤석이가 전화를 하더니 무려 봉사대 신덕부장 맡으란다. 두둥! 아니 이게 왠 날벼락! 늙은 신입생이라고 처음가보는 봉사대에 신덕부장이라니그때 왜 한다고 해가지고는 참부담이었다. 윤석이가 교재는 이번에 어떤 선생님이 해주신다고 한다.

음 그래 ? SMA는 교재도 만들어서 가는구나….

난 몰랐다. 신덕부장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려주지 않은체 그냥 할 수 있겠냐고 물었던건 윤석이가 참 똑똑했던 것 같다. 무서운 녀석그래도 선생님이 도와주신다니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윤석이가 책을 도와주실 선생님은 나의 고등학교 후배일거라고 했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고 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다.

 첫 통화 후, ~ .... 3년이나 후배라는데 .... 나의 기말고사 일정을 들은 선생님은 .... 교재 만들 시간은 전~혀 없겠다며…(지금은 선생님과 나름(?) 친하니 오해 없으시길 ) 그러곤 교재 내용이 담긴 설교문을 보낼테니 읽어보고 피드백을 달라고 하셨다. 메일을 받아서 9~10개 정도 되는 한글파일 중 처음 열어본 설교문은 A4 40페이지!!!

,...……..길고ㅎㅎㅎ 나름 열심히 시험 공부하는 틈틈이 주말을 이용해 대충대충 정독하며 빨리빨리 심혈을 기울여 시험보기 직전 족보(학명:야마) 보듯이 읽어서 몇몇 코멘트를 드리기는 했으나 사실 이러 저러하여 결국 선생님은 혼자서 모든 소그룹 교재를 다 만들어 주셨다. 무능한 신덕부장의 한계

 

 

라오스 출국 일주일 전 서울에서 헌신회 및 사전 교육을 위한 모임이 있었다. 시험도 끝내지 못한 ‘양산 촌놈’인 나는 당연한 듯 불참을 선언 했지만 헌신회 전날 밤 늦게 새벽까지 헌신회를 준비한다는 윤석이소식을 듣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안식일 예배만 드리고 서울로 날아 올라갔고 사전교육에는 늦었지만 헌신회는 참여할 수 있었다. 가서 보니 훨씬 바쁘게 생활하시는 선생님들과 학생들도 다 참석해 있는 것을 보고 오지 않았다면 안되었겠구나 라는 반성을 하게되었다. 또 봉사대를 통해 처음 만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봉사대에 대한 기대를 한껏 크게 만들 수 있었다. 특히 반가웠던 분이 한분 계셨는데 예전에 우연히 열린 의사회라는 단체를 통해 의료봉사를 같이 갔던 김영선 간호사님이 우리와 같이 봉사대를 가기 위해 와 계신 것이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봉사 경험이 많으신 분과 함께라니 든든한 마음도 들었다.

 

 

무사히 기말고사를 마치는 동안 회장단과 많은 학생들이 봉사대 준비로 수고를 해주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게 없었다. 할 수 있었던 건 기도

그리고 드디어 1학기가 마쳤다. 출국전날인 20일에 예정되어있던 예비군 훈련도 미뤘다. 20일부터 21일에 있던 동아리 엠티도 안갔다.

 그리고 대망의 721! 나의 SMA 첫 해외 봉사대를 출발한다.

 

 

To be continued…(비행기는 언제타니….)

후기 #4. 24일(화)

아침 6시에 모닝콜을 듣고 잠시 깼다가 다시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전날에 춥게 잠들었기 때문인지 몸이 으슬으슬했고 목도 좀 부어 있었다. 방 밖으로 나가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면 환자가 적게 올 것이고, 그러면 전날만큼의 혼잡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씻고 6시반에 예배를 드리러 모였다. 오늘 아침 말씀은 현지 통역이 자신이 하나님을 믿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는 간증시간이었다. 불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대학교 유학 때문에 재림교 목사인 삼촌 집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된 과정을 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폐암에 걸리고,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지만 아버지가 사망하고,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다. 특히 서준이의 정확하면서도 재치 있는 통역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좋았던 시간이었다.

 

예배 후에는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이날은 특별히 강하라 선생님의 오카리나 연주가 있어서 좋았다. 연주는 다 좋았지만 변주를 시도했던 마지막 곡에서 잘 연주가 되지 않아 용두사미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옥에티였다.

 

식사 후에 진료소로 이동했다. 비가 왔기 때문에 다들 한국에서 공동 구매한 우비를 입고 차에 탔다. 많은 학생들이 트럭 짐칸에 타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해 보일 텐데, 거기에다가 알록달록한 색깔의 우비마저 입고 있으니 라오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적게 와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빗물로 인해 땅바닥이 젖어 있어서 트럭에서 내리면서 발이 진흙 범벅이 되었다. 발이 젖지 않고 내릴 수 있는 곳에 차를 세워줬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석이가 나서서 건강교육 장소 주위에 줄을 감고 번호표를 만들었다. 진료 준비를 하면서야 듣게 된 사실은 전날에 300여명의 환자들에게는 차트를 주어서 돌려보냈고 그 사람들이 오늘 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차트를 전부 걷어서 보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세웠던 계획을 즉석에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전날에 걷어서 보관하고 있던 모든 차트를 통역들을 통해서 환자들에게 전부 다시 나누어 주었다. 오늘 처음 온 환자들의 경우에는 오늘은 진료를 받을 수 없고 다음 날에 찾아오도록 안내하고 번호표를 주어 돌려보냈다. 전날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진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별표 스티커를 받았던 환자들을 우선적으로 접수 받아 진행했고 그 이후에는 차트번호가 빠른 사람부터 순서대로 들여보내서 진료했다.

 

방문진료는 강기훈 선생님께서 진하와 함께 가시기로 했다. 체중과 키만 재기로 했던 기존 계획에서 바뀌어서 진료까지 하게 되었고, 방문진료로 배정해 두었던 사람들의 명단에도 변경이 있어서 혼란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다.

 

조현정 선생님은 기술이전 세미나를 하러 도립병원에 다녀오셨다. 그런데 하필 조현정 선생님께서 도립병원에 가 계신 오전 동안에 진료실에 찾아와 아이를 분만한 산모가 있었다. 아이와 산모의 상태가 둘 다 좋지 않았지만, 여러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분만과 그 이후의 조치가 잘 이루어졌다.

 

나는 오전에 예진, 오후에 진료보조를 했다. 오전 예진은 한-라 통역을 하시는 조범수님과 함께 진행했다. 아무래도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말이 잘 통했고, 의학 용어도 어느 정도 이해하셨기 때문에 예진하기가 힘들지 않았다. 또한 진료 둘째 날이어서 그런지 전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질서 유지도 잘 되었다. 오후에는 최대로 선생님의 진료 보조를 하면서 물리치료/ECG도 함께 했다. 이날은 질서 유지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EMR을 사용하지 않았다. 약속처방을 손으로 옮겨 적고 cosign을 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진료를 마친 뒤에 전날 저녁을 먹었던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왔다. 용과와 렁간 등의 과일이 제공되었던 것은 좋았다. 나는 전날과 달리 채식주의자 자리에 같이 앉아서 식사를 했다. 현정이 누나가 파래김을 챙겨오셔서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다만 다들 밥을 거의 다 먹고 난 다음에야 파래김을 기억해 내신 것은 약간 아쉬웠다. 후식으로는 라면을 먹었다. 원래는 숙소에서 끓여 먹으려고 가져왔던 라면이었지만, 숙소에서 조리를 할 수가 없어서 이곳 식당에서 만들어 먹은 것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라면이었기 때문에 맛있게 먹었지만 내 입맛에는 짜게 느껴졌다.

 

식사 후에 피드백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피드백 후에 현정이 누나는 분만중인 산모를 보러 몇몇 사람들과 함께 다시 병원에 가셨다. 남은 사람들은 박병원 선생님의 지중해빈혈에 관한 사업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 라오스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박병원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한 번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그때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박병원 선생님께 대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 소그룹을 했다. 이날은 우리 1조가 1층에서 소그룹을 하는 날이었다. 박병원 선생님은 다른 숙소에서 잠을 주무시게 되어서 함께하시지 못했다. 조현정 선생님은 분만하는 산모를 보러 가시느라 병원에 가 계셔서 함께하시지 못했다. 남은 6명이 2개의 침대에 3명씩 나누어 앉아서 소그룹을 했다. 유민이가 조장으로서 잘 지도해 주었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짧지만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소그룹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