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취재] 라오스에 ‘사랑묘목’을 심다

지난 8월 3일부터 연속 6회 시리즈로 출고된 재림마을 뉴스센터의 <[동행 취재] 라오스에 ‘사랑묘목’을 심다> 기사전문입니다.. 너무 길어 읽다 불쾌지수와 짜증 게이지가 폭발할 겁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마치 한 편의 알흠다운 꿈을 꾸고 돌아온 듯한 그날의 감동이 새록새록 행간에서 되살아나귈 진심 바라마지 않습니다..

끝으로 여러분의 노고와 헌신이 머잖아 라오스에 화려하게 꽃 피우길 기도합니다.. 사진과 동영상 등 기타 자료는 재림마을 뉴스센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쩔어주는 강남스똬일 올림 –

[동행 취재] 라오스에 ‘사랑묘목’을 심다
사랑나눔의사회 – SMA, 쿤 해외무료진료 현장에서

내륙일부 지방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되는 등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21일.

사랑나눔의사회(회장 임태우) 소속 의사와 재림교인 의.치.한의대생 모임인 SMA(SDA Medicalstudents Association / 학생대장 함윤석) 회원, 그리고 간호사와 협력자원봉사자 등 40여명의 대원은 라오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7박8일 동안 라오스 씨엥쾅도 쿤군 일대에서 ‘사랑나눔의료봉사 – 찾아가는 선생님’ 해외무료진료 활동을 펼치고 돌아왔다.

이번 행사는 특히 쿤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해외 의료팀의 무료진료인데다, 지난 4월 사랑나눔의사회가 라오스 보건국과 한국 민간단체로는 최초로 다년도 업무협약을 맺은 후 실시한 첫 봉사활동이어서 의미를 더했다.

별다른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구촌 이웃들의 아픔을 나누고, 국제의료협력 증진을 위해 진행된 이번 활동에는 총책임자 최대로 선생(사랑나눔의사회 교육이사 / 한림대 춘천 성심병원 혈액종양내과 조교수)을 비롯해 강기훈 선생(내과), 조현정 선생(산부인과), 강하라 선생(소아과), 조유미 선생(내과), 최해리 선생(치과), 금은철 선생(치과) 등 의료진이 참여했다. 특히 과거 KOICA 일원으로 라오스에서 3년간 봉사했던 박병원 선생(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심장내과)이 합류해 큰 힘이 됐다.

또 김영선, 조수현 간호사와 이수정 약사가 함께 해 환자들의 회복을 도왔으며, SMA 대학생과 교사, 학생으로 구성된 협력봉사자들이 이들을 조력했다. 이와 함께 사랑나눔의사회 라오스 사무소장 오경림 이사와 사무국 한여울 선생, 김형준 간사 등 현지 활동가들이 라오스 정부와의 코디네이션에 도움을 주었다.

봉사대는 이번 기간 동안 쿤 군립병원에서 실시한 무료진료와 산간오지마을 소수민족마을 방문진료, 이 닦기, 금주.금연 등 주민보건 및 위생교육, 라오스 병원과의 기술이전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여기에 현지에서 모자보건사업을 펼치고 있는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관계자를 강사로 초빙해 보건의료 국제개발에 관한 사례를 연구했으며, KOICA를 통한 해외의료 봉사경험을 공유하는 뜻 깊은 시간을 갖기도 했다.

라오스는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중앙부에 있는 내륙국. 1893년부터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어 지배를 받다 1949년 7월 독립했다. 1975년 공산혁명을 통해 사회주의국가가 되었다. 라오룸족(68%), 라오퉁족(22%), 몽족 및 야오족을 포함한 라오숭족(9%) 등 다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민 대부분이 불교(67%)나 샤머니즘을 숭상한다. 인구는 약 650만 명이며, 1인당GDP는 2,400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이들이 활동을 펼친 씨엥쾅도 쿤군은 라오스가 프랑스 지배를 받던 시절, 도청소재지였다. 라오스에 단 세 곳 뿐인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불교유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인구는 약 3만3000명. 77개의 촌락에 41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도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도로사정을 갖추고 있어 의료봉사활동을 펼치기에 좋은 곳이었다.

주민들은 평소 도청소재지인 폰사완시의 도립병원을 이용하는데, 기관지나 소화기 질환, 감기, 뇌막염 등을 많이 앓고 있다. 이번 기간 동안 진료를 받은 수혜자는 모두 1300명가량으로, 이중에는 분만환자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사랑나눔의사회와 SMA가 함께 펼친 라오스 무료진료 활동에 재림마을 뉴스센터가 동행했다. – 편집자 주 –

7월 21일 … ‘사바이디~ 라오스!’
오후 3시. 약속장소인 인천국제공항 D 카운터 앞에는 의약품과 의료장비, 생활용품 등을 담은 짐이 수북하게 쌓였다. 의약품만 대형 상자로 10박스를 훌쩍 넘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모두 라오스 의료봉사활동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수하물을 접수하는데 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연결편 지연으로 30분이나 늦게 출발한 비행기가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치솟았다. 얼마를 날았을까.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야경을 드러낸 어느 이름 모를 도시의 상공을 몇 번 지나자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의 왓타이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들려왔다.

약 5시간30분간의 비행을 마치고 라오스에 첫 발을 디뎠다. 사랑나눔의사회 현지 사무소장 오경림 이사와 한여울 간사 등 관계자들이 공항까지 마중 나와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이들의 환한 미소에 장시간의 비행에 찌든 피로가 싹 가시는 듯 했다.

대원들은 도착과 동시에 저마다 역할을 분담해 일사분란하게 짐을 나눠 트럭에 실었다. 민첩하게 행동했지만, 역시 짐의 양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공항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여장을 푼 이들은 쉴 틈도 없이 소그룹 별로 모여 앞으로 일주일간의 봉사활동 기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협의에 들어갔다. 각 파트와 개인별 역할 분담 등을 의논하는 대원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으로 흐르고 있었다. 라오스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7월 22일 … 라오스 보건국과의 MOU 체결 후 첫 진료봉사 ‘스타트’
동이 트자 일행은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의료봉사가 진행될 씨엥쾅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오전 10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씨엥쾅은 지표상 거리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중간에 험한 산맥이 자리하고 있어 육상으로 이동하기 힘들어 항공편을 선택했다. 쌍발프로펠러 비행기는 굉음을 내뿜으며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창밖으로는 족히 수천 미터는 되어 보임직한 험산이 마치 손 내밀면 닿을 듯 가까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내 끝도 모를 만큼 시원하게 펼쳐진 평야를 지나, 대지를 휘감느라 꼬불꼬불 허리가 휜 강줄기를 벗 삼는다. 갑작스런 기류의 변화로 심하게 흔들리는 기체에 몸을 맡긴 채 열대우림을 지나 약 30분 만에 씨엥쾅공항에 도착했다.

마치 시골 간이역을 연상시키는 작고 소박한 풍경의 공항에 내려 수속을 밟았다. 대중교통 등 마땅한 교통수단이 빈약한 현지 사정상 대원들은 트럭의 짐칸에 올라 한 시간 거리의 쿤군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진료소가 차려질 쿤 군립병원에는 휴일임에도 도 보건국 대외협력국장과 도 정부 대외관리국장 등이 병원장과 함께 나와 이들을 환영했다. 이번 기간 동안 이들의 ‘입’이 되어 무료진료를 도울 통역자도 자리를 함께했다.

“사바이디(안녕하세요?)”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이마에 가볍게 대며 미소를 짓는 이들의 푸근한 인사에 진한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쿤 군립병원은 이 지역의 중심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본관을 중심으로 2개의 부속 건물이 날개처럼 양 쪽에 자리 잡은 아담하고 조용한 시설이었다. 하지만 열악한 의료환경과 낙후한 기술로 주민들에게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부랴부랴 쌀국수로 대충 요기를 한 일행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각 파트별로 나뉘어 진료 준비에 들어갔다. 접수, 내과, 산부인과, 치과, 물리치료, 심전도, 약국, 건강교육 등 스테이션별로 장소를 정하고 장비를 설치했다.

인력을 배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다. 병실과 침상을 깨끗이 청소하고, 책상의 위치를 바꾸고, 준비해 온 장비와 치료기구를 설치했다.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던 병원은 완벽하진 않아도 금세 그럴 듯한 진료소로 바뀌었다. 이제 내일이면 그동안 아파도 변변히 치료조차 받지 못했던 환자들의 발걸음으로 붐빌 것이었다. 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 한 켠에 나눔의 행복과 기쁨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사이 라오인들도 천막을 치고, 액정과 스크린을 설치하는 등 일손을 보탰다. 멀리 한국에서 온 봉사대를 향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듯 했다. 중량제한 때문에 비행기에 싣지 못하고 새벽녘 비엔티안에서 트럭으로 실려 보냈던 짐이 도착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오후 6시를 훌쩍 넘겨서야 모든 세팅과 테스트가 겨우 끝났다. 하지만 장비가 자리를 잡았다고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때부터는 실제로 환자를 맞이할 동선을 체크하고, 진료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시간이다.

환자와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통역 시스템도 점검한다. 환자의 증상과 상태를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라오어나 몽족어로 통역한다. 각 의과별로 자주 사용하는 몇 가지 단어와 문장은 아예 암기했다.

사랑나눔의사회의 이번 활동은 주로 무료진료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었다. 이는 현지의 약값 때문이다. 라오스에서는 환자가 의사의 진료를 받는 것은 무료지만, 치료에 필요한 각종 물품이나 약품구입은 온전히 본인 부담이다.

심지어 수혈 처방을 받은 응급환자라도 보호자가 혈액은행에 가서 혈액을 직접 사와야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극빈자 카드를 갖고 있으면 약값이 면제되긴 하지만, 그럴 경우 ‘좋은 약’을 주지 않을까 싶어 수혜자여도 카드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때문에 무료진료를 통해 양질의 약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싶은 것이 사랑나눔의사회의 마음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마을주민 몇몇이 신기한 듯 창문에 기대 이들의 모습을 조심스레 훔쳐봤다. 간혹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말없이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마치 ‘내일 만나요’라고 인사하는 듯했다.

대원들의 티셔츠는 어느새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시계바늘은 오후 8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서로 돕고 힘을 모은 결과가 서서히 체계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밤이 지나면 본격적인 봉사활동이 시작될 것이었다. 뭐라 말은 하지 않지만, 다들 긴장과 기대가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7월 23일 … ‘라오스 국민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길’
오전 8시. 드디어 무료진료 첫 날 아침의 커튼이 열렸다. 본격적인 진료에 앞서 쿤군 군수와 도 보건국 대표 등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랑나눔의사회 무료진료단을 환영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들은 한국에서 전문의료인이 사랑의 의술을 펼치기 위해 라오스까지 와 준 것에 감동하며 각별한 고마움을 표했다.

쿤 군립병원 운동장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의 발걸음으로 북적였다. 군청에서 일찌감치 안내방송을 하고, 광고가 잘 된 덕에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게 중 먼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전날 출발해 친척집에서 자고 새벽같이 이곳을 찾은 이도 있었다. 라오족뿐 아니라, 고산지대에 사는 몽족인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며칠 전 나무에서 놀다 떨어져 팔이 부러진 아이,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고열이 올라 칭얼대는 손자를 업고 온 할머니, 잔뜩 찌푸린 날씨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멋을 한껏 낸 중년의 신사와 두 손을 꼭 잡고 나온 금슬 좋은 노부부 등 모두 반갑고 즐거운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네 아주머니의 얼굴에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환자들로 준비해 놓은 의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꽉 들어찼다.

오전 9시 시작된 오전진료는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로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접수창구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붐볐다. 진행요원이 무질서한 군중을 정리하느라 한동안 진땀을 빼야했다.

올해는 특히 해외의료봉사 활동 처음으로 전자의무기록(EMR: Electronic Medical Record) 시스템을 시도했다. 그러나 현지 사정으로 오전 11시경 부득이하게 종료해야 했다. 불안정한 통신망 탓에 컴퓨터에 자꾸 버그가 생겼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이른 종료에 한국에서부터 며칠을 고생해 시스템을 구축한 남동우 대원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소아과 병동 … 엄마 등에 업혀 온 실명아동 ‘안타까움만…’
소아과는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풍선아트로 장식됐다. 삭막했던 병실이 누구나 좋아할 만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노란색, 녹색, 분홍색 등 형형색색의 풍선은 강아지, 나비, 꽃 등 아기자기하고 앙증맞은 캐릭터로 변해 환자를 맞이했다. 아이들의 천진함과 잘 어울려 편안해 보였다.

오전 11시. 한 아이가 엄마의 등에 업혀 헐레벌떡 소아과 병동으로 뛰어 들어왔다. 얼마 전 칼로 왼쪽 눈을 찔렸는데, 초기치료에 실패해 눈동자에 종양이 생긴 것이다. 카콤이라는 이름을 가진 올해 네 살의 이 소년은 계속 엄마의 치마가랑이를 붙잡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부풀어 오른 종양에 아이는 눈도 제대로 뜨고 감을 수 없었다. 언뜻 봐도 당장 수술이 필요해 보였다.

순간, 소아과 담당 강하라 선생의 낯빛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기서는 단순히 안약만 처방할 수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큰 병원으로 가 전문수술을 받아야하는 긴급한 상황이었다.

강 선생은 “이미 한 쪽 눈은 실명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하며 “만약 종양이 계속 부풀어 오른다면 평생 저렇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종양이 더 커지거나 안구 내부로 파고들면 더 악화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게다가 감염이 번져 바이러스가 뇌로 침입한다면 치명적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수술을 권유했지만, 아이 엄마는 “돈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에게는 급한 대로 눈의 붓기가 계속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약이 처방됐다. 이것이 근본적 치료가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강하라 선생의 눈가에 더 이상 어떤 조치도 취해줄 수 없다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교차해 지났다.

산부인과 병동 … 갑자기 복도서 쓰러진 산모에 ‘화들짝’
같은 시각, 갑자기 산부인과 병동이 부산해졌다. 친정아버지의 진료를 도우러왔던 한 임산부가 복도에서 쓰러진 것이다. 응급상황에 각 실에 있던 의료진이 모두 급박하게 모여들었다. 재빨리 혈압을 재고, 동공을 확인했다.

라오어가 가능한 박병원 선생이 환자와 대화를 시도하며 의식을 체크했다. 다행히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였다. 의료진은 환자를 다급하게 병실로 옮겨 치료를 시작했다. 검진 결과 큰 이상은 없었다. 임신빈혈 증상이었다. 수액을 투여하고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환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부인과 조현정 선생은 “혹시 태아에게 영향이 있을지 모르니 초음파를 찍어보자”며 환자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별일 아니다. 부끄럽게 이러지 말라”며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을 아버지와 함께 걸으며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이 걱정스러운 듯, 조현정 선생은 자신의 눈가에서 이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진료소 현관을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진료 후에도 현지 NGO 관계자 초청 특강열기로 ‘후끈’
전쟁터 같던 첫날 진료는 오후 6시가 가까워져서야 마무리됐다. 각 병실을 정리하고 청소한 후 스테이션별로 모여 그날의 활동 피드백을 시작했다. 좋았던 점, 부족했던 점, 평가와 개선사항 등 하루 활동에 대한 반성과 의견을 교환했다. 더 효율적인 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저녁식사와 함께 현지에서 모자보건사업을 펼치는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백주왕 과장의 특강이 마련됐다. 백 과장은 라오스에서 진행 중인 모자보건사업의 현황과 특징, 향후 전망과 계획, 한국과의 연계사업 등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오후 내내 진료현장에 머물며 이들의 활동을 지켜본 백 과장은 “그동안 많은 봉사단을 만나봤지만, 의료봉사대는 처음”이라며 “라오스 국민들이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여러분이 큰 힘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분주하게 활동하며 움직인 탓에 피곤할 법도 한데, 대원들의 눈빛은 더욱 반짝였다. 마치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되새기는 듯 했다.

7월 24일 … ‘산간오지의 보금자리’ 몽족마을 이동진료
쿤 군병원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몽족마을로 이동진료가 있는 날이다. 내과 전문의 강기훈 선생과 의대생 정진하 양, 이수정 약사, 통역 등 스태프들이 도 보건국 소속 공무원의 안내로 이동진료에 나섰다.

언뜻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첩첩산중 고산지대의 가파른 외길을 따라가야 이들의 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도로포장이 되어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곧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산간오지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사는 몽족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몽족은 중국 한족의 주류역사 시작 이전부터 중국에 거주하던 민족. 강한 씨족단위의 유대감 속에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현재 라오스 북부지역을 비롯해 중국,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 흩어져 있다. 이 마을에는 26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마을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단의 주민과 관계자들이 차에서 내리는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옆에 소총으로 무장한 이들이 서 있어 깜짝 놀랐다. 마을책임자인 이들에게는 실탄과 총이 지급된다고 한다. 산짐승으로부터 가족과 주민을 보호하고, 혹시 모를 반군과의 교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임시진료소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학교에 차려졌다. 비가 내려 질퍽해진 비탈길을 미끄러지며 약통과 장비를 들고 오르느라 진료도 시작하기 전 진땀을 뺐다.

시간이 되자 마을주민들이 여기저기에서 몰려들었다. 삽시간에 족히 100명은 되어 보임직한 사람이 좁은 교실에 모였다. 진료는 영어와 라오스어, 몽족어가 교차하는 3중 통역을 거쳐야 겨우 진행될 수 있었다.

환자들은 주로 위궤양 등 소화기 장애와 갑상선염, 폐렴 증세 등을 앓고 있었다. 주로 화전을 경작하는 등 평생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보니 근골격계 질환의 통증을 호소하는 이도 많았다. 강기훈 선생의 꼼꼼하고 친절한 진료가 이들의 마음까지 치료해 주는 듯 했다.

옆 교실에서는 건강교육이 열렸다. 돼지, 소, 닭 등 가축과 함께 생활하는 이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기생충예방 등 위생교육 위주로 진행됐다. 주거문화개선 등 주민 생활환경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지만 아직 이들에겐 요원한 이야기다.

정부와 NGO에서 위생교육을 하고 있다지만, 이들의 근본적인 생활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건강교육에 참여한 주민들의 손에는 구충제가 하나씩 쥐어졌다. 준비해 간 비타민영양제는 아이들에게 큰 선물이자 기쁨이 되었다. 양은 얼마 되지 않아도 그 새콤하고 달콤한 맛은 아이들의 가슴에 추억이 되어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었다.

우기의 라오스 산간지역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햇살이 반짝이며 쾌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다가도, 갑자기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곤 했다. 그러나 몽족인들은 비가 온다며 부산스럽게 호들갑을 떨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고 넉넉한 미소로 낯선 풍경을 대하는 이방인을 지켜볼 뿐이었다.

오전 11시가 넘어갈 즈음. 한 아이가 울면서 엄마 품에 안겨 진료실에 들어왔다. 이제 겨우 갓 두 살을 넘겼다는 아이는 오른쪽 허벅지가 온통 곪아 있었다. 진피와 피하 조직에 나타나는 급성 화농성 염증인 봉와직염이었다. 언뜻 육안으로 보더라도 금방 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강기훈 선생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상처가 너무 깊어 즉시 수술이 필요해 보였다. 그 상태로 두었다간 패혈증으로 발전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만약 뼈까지 침투한다면 골수염이 될 수도 있다. 설명을 듣던 엄마는 조심스런 표정으로 보채는 아이의 입에 젖을 물려주었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곧바로 쿤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아이를 후송하기 위해서다. 쿤 병원에서는 주사제라도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만약 쿤 병원에서 치료가 안된다면 더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숨 쉬지 않는 신생아 … ‘아이를 살려라!’
같은 시각, 쿤 병원에 한 산모가 들어섰다. 출산이 임박했는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현지 의료진에 대한 기술이전과 협력사업 관계로 산부인과 조현정 선생이 자리를 비운 터였다. 병원 관계자도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김영선 간호사가 부리나케 응급실로 향했다. 20대의 산모는 초산이라 그런지 더 힘겨워하는 듯 했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산모는 보호자도 없이 진통을 거듭하며 몸부림 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산모가 아이를 분만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아이가 숨을 쉬지 않았다. 떠나갈 듯 울어야 할 울음도 터지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소아과 강하라 선생이 뛰어 들어갔다.

아이는 그때까지도 숨을 쉬지 않았다. 강 선생은 순간, 사산아인줄 알았다. 그와 김영선 간호사는 곧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산소공급이 급박한 상황이었다. 자칫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다간 소중한 생명을 담보할 수 없었다.

산소호흡기로 산소를 정상적으로 공급해야 했지만, 병원에는 그런 장비가 전혀 갖추어있지 않았다. 마침 강하라 선생과 김영선 간호사의 시야에 종이컵이 들어왔다. 둘은 종이컵을 아이의 입에 대고 산소호흡기를 대신했다. 곧 거짓말처럼 아이가 숨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김 간호사는 그때부터 산모와 아이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아이가 자칫 몸부림을 치면 그나마 응급조치로 붙여놓은 종이컵이 떨어질 게 뻔했다. 산모와 아이를 후송하기 위해 폰사완시에 위치한 도립병원에서 출발한 앰뷸런스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 이들을 떠나보내는 봉사대원들의 마음이 걱정스런 눈빛만큼이나 무거워 보였다. 앰뷸런스가 토해내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묻혀 시간은 또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당장 수술이 필요합니다” … “그건 가족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오후 2시. 봉와직염으로 치료가 필요했던 몽족마을의 아이를 태운 자동차가 쿤 병원 주차장에 들어섰다. 곧바로 소아과 강하라 선생에게 향했다.

“언제부터 이랬나요?”

“한 달 전쯤부터요. 갑자기 종양이 커졌어요. 이유는 저희도 모르겠어요”

“그동안 치료는 안 받았나요?”

“병원에서 두 번이나 주사를 맞긴 했는데, 별다른 효과가 없었어요. 오히려 증상이 더 심해졌어요”

아이의 엄마와 대화를 주고받던 강하라 선생이 고민에 빠졌다. 아이는 장기간의 입원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적어도 열흘 이상 항생제주사를 맞으며,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번 해외진료에서는 외과적 수술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더 답답했다.

도립병원이나 큰 병원으로 가서 계속 주사를 맞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자, 더 이상 병원진료는 어렵다며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보건당국 공무원도 “이 문제는 가족이 판단하고 선택할 문제”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강 선생이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현재의 여건상 항생제주사를 놓아주는 것 밖에 달리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분의 약을 처방해 주었지만, 이마저도 완치를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아이는 이번 봉사기간 동안 계속 진료소를 방문해 치료를 받기로 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현지 의료진에 대한 기술이전 세미나 관계로 자리를 비웠던 조현정 선생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를 기다리는 또 한 명의 환자가 있었다. 바로 가족과 함께 진료소를 찾은 산모였다. 역시 초산이라는 이 산모는 그러나 생각보다 출산이 더뎠다.

이날 밤 조현정 선생과 이수정 약사, SMA 대원 구원 양 등 몇몇 스태프는 출산을 기다리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라오스 의료봉사에서 ‘당직근무’를 설 줄은 몰랐다며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조 선생의 입가에 싫지 않은 미소가 담겨 있었다.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언제나 말씀과 기도
이날 밤 대원들의 숙소. 하루일과를 마무리 짓는 순서는 언제나 소그룹활동이다. 찬양과 기도, 말씀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되짚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모았다. 특히 의료계 대선배인 강기훈 선생은 ‘젊은’ 후배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관계, 사랑의 본질을 성경과 접목해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특강을 마련해 도움을 주었다.

강 선생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며 봉사와 건강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 잘 아신다. 결국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의료사역을 위해 어떠한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지 묵상하는 대원들의 표정과 뜨거운 후배 사랑을 보여준 강기훈 선생의 열정이 겹치며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치열했던 봉사대의 하루는 그렇게 또 한 번의 밤을 맞고 있었다.

7월 25일 … ‘울고’ ‘웃고’ ‘빼고’ 치과 진료실 풍경
이날 아침은 아기의 울음소리로 시작됐다. 밤새 진통하던 산모가 새벽 4시경 3.5Kg의 건강한 사내아이를 순산했다. 산모와 아이아빠는 물론, 곁에서 출산을 지킨 할머니는 첫 아이의 출생을 무척 기뻐했다. 봉사대원들도 병실을 직접 찾아와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했다.

발길을 치과 진료실로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에 걸린 스탈린과 레닌의 사진액자가 눈에 띄었다.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쿤 병원에는 치과의사가 한 명뿐이다. 진료의자는 비엔티안에 있는 병원에서 쓰던 것을 지원받은 것이다. 도립병원에도 치과의자가 한 대뿐인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시설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병원을 찾는 환자의 질병종류와 열악한 도로사정을 감안하면 이곳 주민들에게 치과진료는 어쩌다 만나게 되는 봉사팀을 기다리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탁자와 책상을 붙여 만든 5개의 진료의자엔 환자가 빼곡히 들어 차있었다. 주로 스케일링이나 발치 환자들이다. 평소 치아관리가 잘되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식습관도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어둡고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습기까지 높아 연신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대원들은 2인1조가 되어 손발을 맞췄다. 찰떡호흡이다. 한쪽에서는 기구를 소독하는 손길이 바쁘게 오갔다.

조용하던 진료실에 갑자기 ‘전쟁’이 벌어졌다. 치과 기구를 처음 본 한 아이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치료에 협조를 하지 않아서다. 발버둥치는 아이는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금은철 선생이 급하게 배운 서툰 라오어로 아이를 어르고 달랬지만, 녀석은 발을 동동 구르며 저항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뒷짐을 지고 조용히 지켜보던 아이의 아빠가 의사선생님 보기 미안했던지 녀석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냅다 호통을 쳤다. 그제야 아이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아이의 눈빛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 ‘공포’가 어떤 건지 잘 알기에 아이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친구 따라 호기심에 진료소에 온 동네꼬마는 치과진료소의 모습에 겁이 덜컥 났다. 처음 보는 신기한 의료장비와 집게, 핀셋 등이 무시무시한 포스를 드러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치~치~’ 거리며 하얀 연기를 내뿜는 이름 모를 장비도 무섭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럴 땐 빨리 발길을 돌려 집으로 줄행랑치는 것이 살 길 같아 보였다.

‘아뿔싸!’

먼저 진료소에 들어간 친구가 울음을 터트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문 밖으로 스쳤다. 모른 채 하고 도망가려니 영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창가에 턱을 괴고 걱정스런 모습으로 지켜보던 아이의 마음에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드는 듯 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이름이 불리고 난 후였다.

간단한 검사 후 아이는 썩은 이를 뽑았다. 하필 정중앙 앞니다. 예쁜 의사누나에게 용감한 사나이로 보이려 ‘라이벌’인 친구 녀석보다 소리도 지르지 않고, 아우성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은 찔끔 났다. 의사누나가 “잘 참았다”면서 등을 토닥여줬다. 이쯤이면 판정승이다.

하지만 비주얼이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거울에 비쳐보니 앞니가 빠진 자신의 모습이 영 볼품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어색하고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뽑지 않았으면 옆의 이까지 함께 썩을 뻔 했다는 의사누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료소를 나서는 아이의 손에 의사누나는 빠진 이를 ‘기념품’으로 쥐어주었다. 아이는 친구 손을 붙잡고 천진하게 웃으며 비 내리는 거리를 냅다 가로질러 지났다. 서로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까르르 넘어가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길 건너까지 청명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치과 의사누나의 입가에도 빙그레 웃음꽃이 피었다.

나통마을 이동진료 … 의료기술 전수세미나 ‘바쁜 하루’
이날 오전에는 병원에서 약 30분가량 떨어져 있는 나통마을로 방문진료를 떠났다. 라오족이 사는 산간마을이다. 강하라 선생과 김영선 간호사, 전주향 약사 등이 동행했다. 빗물을 잔뜩 먹은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한참 달리다보니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진료는 이 마을의 보건소에서 진행됐다. 전날 몽족마을보다 훨씬 환경이 좋았다. 약국이 분리되어 있고, 진료실도 훨씬 쾌적했다. 주민들의 모습도 꽤 단정해 보였다. 이 마을에서는 이날 하루 80여명의 환자가 치료를 받았다. 이들 역시 대부분 소화기 질환이나 피부염을 앓고 있었다.

전주향 약사는 틈틈이 아이들을 위해 올바른 손 씻기 법을 알려주었다. 처음 접하는 내용이라 그런지 아이들의 표정이 신기하기도 하고, 쑥스러운 듯 보이기도 했다.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드는 환자들을 진료하느라 대원들의 유니폼은 금세 땀으로 뒤범벅됐다. 하지만 이들은 잔잔한 눈웃음으로 환자를 맞이했다. 주민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진 것은 물론이다.

오후에는 혈액종양 내과 전문의인 최대로 선생이 폰사완시에 위치한 씨엥쾅 도립병원을 찾아 의료기술 전수세미나를 진행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혈액과 세포, 빈혈, 혈액검사 방법 등에 대해 강의했다. 사랑나눔의사회 봉사팀은 이번 기간 동안 심장초음파, 복부초음파, 산부인과초음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도 보건국의 협력을 얻어 진행된 이 세미나는 이번 활동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지역주민의 건강증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현지 의료진과 펼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형태의 협력사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강의를 듣기 위해 도립병원 직원뿐 아니라, 씨엥쾅에서 자동차로 5시간 거리에 떨어진 목마이에서도 의사와 의료진이 참석하는 등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최 선생의 강의는 당초 약속된 시간을 한참 지나도록 계속됐다.

한밤중 대원들이 모두 골방에 모인 까닭은?
이날 밤. 대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사연은 이랬다. 이날 오전 께오깐마을 이동진료 현장에 한 사내아이가 부모와 함께 찾아왔다. 올해 네 살 된 이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목에 혹이 생겼다. 작년에 수술을 했지만, 종양이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았는지, 혹은 계속 자랐고 이제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종양이 악성인지 여부는 CT촬영을 해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혹이 호흡기를 계속 누르고 있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가래가 제때 배출되지 않다보니 폐렴증상까지 겹쳐 하루빨리 장기적인 입원치료가 필요했다.

쿤 병원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베엔티안이나 폰사완의 대형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후, 전문의로부터 치료를 받아야했다. 그러나 아이의 부모는 돈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를 이대로 두었다간 생명이 위급한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부모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아이의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대원들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자발적으로 수술비용을 모으기로 했다. 어느 누구의 요청도 없었지만,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 헌신하기로 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500달러의 자금이 모아졌다. 이 정도면 급한 대로 수술과 입원치료 비용은 될 것 같았다. 이튿날, 아이는 부모와 함께 폰사완의 도립병원으로 떠났다. 대원들의 의료봉사가 무료진료뿐 아니라, 실제로 한 생명을 살리는 손이 된 순간이었다. 이처럼 이번 활동은 아프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마음 한 자락을 나눠주는 따뜻한 현장이 되기도 했다.

7월 26일 … 한 명의 환자라도 더 … ‘마지막 땀방울까지’
어느덧 진료 마지막 날 아침햇살이 떠올랐다. 이제 겨우 적응이 되고, 손발이 맞는 것 같아 진료 속도도 한결 빨라졌는데, 벌써 마지막이라니 대원들의 표정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아침부터 한 병실에서 어린아이의 떠나갈듯 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신생아의 그것은 아니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외침이었다. 엊그제 몽족마을에서 봉와직염으로 후송되었던 아이를 치료하는 소리였다. 그나마 지난 이틀사이 주사도 맞고 약을 먹어 많이 나아진 상태였지만, 이대로 집으로 보냈다간 재발이 불 보듯 뻔했다.

조현정 선생이 고름을 직접 손으로 짜내기 시작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찢어질 듯 더 커졌다. 고름과 피가 뒤섞여 여린 피부를 타고 쉼 없이 흘러내렸다.

조 선생의 장갑에 피와 고름이 범벅됐다. 짜내지 않아도 피와 진물이 수돗물처럼 터져 나왔다. 체내에 고름격막이 여러 개 형성되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아이는 발버둥 치며 자지러질 듯 울음을 토해냈다.

“아가. 아프지? 미안해 조금만 참아. 곧 나을 거야…”

조 선생은 울부짖는 아이를 어르며 치료를 계속했다. 피와 고름을 닦아낸 수십 개의 거즈가 어느새 휴지통으로 가득 찼다. 울다 지친 아이는 눈물마저 말라 버린 듯 했다. 머리는 온통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일단 손으로 격막의 고름을 빼낸 후 체내에 남아 있는 잔량을 제거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얇은 호스를 삽입했다. 주사기로 남아 있는 고름을 빼내면 하루나 이틀 후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붓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약 30분간의 치료는 주사제와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끝났다. 땀과 눈물에 젖은 아이머리를 어루만지는 부모의 눈가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교차했다. 조현정 선생도 그제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아침시간이었지만, 그사이 환자는 평소보다 두 배나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봉사기간 중 가장 바빴던 약국 … “이 약 드시고 꼭 건강해지세요!”
무료진료 기간 중 가장 바쁜 곳 중 한 곳은 약국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처방전을 받은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기도 했다. 의과와 치과 환자 모두가 몰리다보니 숨 돌릴 틈도 없었다. 게다가 처음 얼마간은 모자란 일손 때문에 골치를 썩기도 했다. 특히 통역이 없어 이수정 약사는 홀로 고군분투해야 했다.

진료가 시작되기 전부터 자주 쓰는 처방표현과 용법, 용량을 라오어로 정리해 대처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약 종류가 많아지거나 설명이 복잡해지면 그의 입에서 헛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마치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지…’ 하는 걱정 같았다.

그 중 백미는 설사증상과 안과질환을 함께 안고 온 어린아이. 먼저 분말로 된 소화약을 뜯어 시럽병에 넣고, 정량의 물과 용해시키는 법을 직접 시범 보였다. 이를 하루에 몇 번씩,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 라오어 설명을 덧붙인다.

여기에 안질환까지 있어 안약을 넣는 방법도 알려주어야 했다. 2시간에 한 번씩 안약을 넣으라는 말을 손짓발짓으로 건네고, 알약은 식후 30분 후 하나씩 사흘 동안 먹이라고 이야기한다. 다행히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했는지 아기아빠는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가 되자 이 약사의 목이 쉬어버렸다.

한쪽에서는 처방전에 따라 약을 조제하는 손놀림이 바쁘게 오갔다. 환자들이 밀려들면서 잠시 앉아 쉴 짬도 나지 않아보였다. 처방전을 손에 든 환자들은 밀려드는데 투약설명이 길어지다 보니 대기시간도 계속 지체되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이 급해지면 안 된다. 괜히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환자가 자칫 약을 오용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꼼꼼하고 자세하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올바른 방법이라는 걸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컵짜이 … 여러분의 사랑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밀물처럼 몰려들던 환자들의 발걸음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드디어 무료진료가 마무리됐다. 군 보건당국의 협조로 큰 혼잡 없이 진료활동을 접을 수 있었다. 현지 공무원들은 지역주민의 기대만큼이나 대원들이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시종 적극 협력했다.

한 시간 후, 병원 인근의 마을회관에서 이들의 활동을 기념하는 환송행사가 열렸다. 쿤군과 병원 측이 주최한 모임이었다. 마을주민 100여명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탁자에는 화려한 꽃장식과 정성껏 마련한 다과가 준비되었다.

이 지역 행정책임자는 “지난 나흘 동안 여러분이 보여준 큰 헌신과 사랑에 감사한다”고 인사하며 “여러분의 도움으로 우리 주민들이 건강을 지킬 수 있었다. 우리의 만남이 앞으로도 계속 되길 바란다”고 인사했다.

단장 최대로 선생은 “만약 여러분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준비한 약이나 의료장비, 인력으로는 이 모든 프로그램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이번 무료진료는 여러분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최대로 단장은 “우리는 앞으로 3년간 시엥쾅 도내 3개 군에서 무료진료를 계속할 계획”이라고 소개하며 “지금까지는 단기봉사활동이었지만, 향후에는 당뇨병이나 고혈압 등 장기치료에 필요한 기술과 건강관리법을 전수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저기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쿤군 당국은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소중한 고마움을 담아 감사장을 전달했다. 굵은 땀방울을 감추던 대원들의 표정에서 뿌듯한 보람과 서로를 향한 대견함이 읽혔다. 대원과 주민들은 해가 서산마루를 넘어가도록 서로의 안녕과 재회를 기원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이번 쿤 지역 무료진료를 통해 의과계열 850명, 치과계열 300명, 마을 이동진료 150명 등 모두 1300여명의 주민이 도움을 받았다. 당초 목표인원을 훌쩍 넘는 수치였다. 또 씨엥쾅 도립병원에서 진행된 의료기술 전수 세미나에는 24명의 현지 의료진이 참석해 선진의료기술을 지원받았다.

이번 활동의 의미는 무엇보다 그 대상이 수혜자이건 봉사자이건 모든 과정에 참여한 이들이 서로 존경하고 행복을 나누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앞으로 의료현장에 나서야 할 ‘예비 의사’ 들에게 나누는 삶의 가치와 소중함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도록 산교육의 장이 되기도 했다.

봉사는 물질이나 육체뿐 아니라 마음의 끝자락까지 모두 비우며 헌신하는 것이란 교훈과 진정한 행복의 방법을 터득하는 시간이었다. 활동을 마친 대원들은 오히려 자신이 나눌 수 있는 사랑의 크기가 이것 밖에 되지 않는 점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 2012년 라오스의 여름은 한낮 태양보다 더 뜨겁고 강렬했던 이들의 사랑과 땀방울을 잊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연일 쉼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지구촌 이웃에게 사랑의 묘목을 심고, 나눔의 밀알을 파종한 45명의 ‘사랑나눔의사회 – 찾아가는 선생님’ 무료진료팀 대원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길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취재수첩을 적셨던 땀방울도 그제야 말라들었다.

[동행 취재] 라오스에 ‘사랑묘목’을 심다”에 대한 2개의 생각

  1. 함박눈

    너무나도 멋진 김범태 기자님+.+ 이렇게 멋진 글로 저희의 활동을 남겨주시니 정말 감사드려요^^
    홈피에 사람의 발길이 뜸해서 아쉽네요ㅠ 이렇게 좋은 글에 폭발적인 반응을 남길 수 없어서ㅠㅠ
    저희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오래 남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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