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믿으면 천국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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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교인들에게 묻고 싶어요 예수믿으면서 온갖 나쁜짓을 하고 자기 욕심만 챙기고 하지만 교회에선 선금도 잘내고 교회안에서만 너무나도
착하고 그런사람은 천국갈수 있을까요 아니면 무교나 다른교를 믿으면서 선행을 배풀고 자원봉사하러 다니고 정말 날개만 없지 천사같은
분들인데 예수를 정말 싫어한다면 그분은 지옥갈까요 궁금합니다 왜냐면 얼마전 사회복지단체에 가계되었는데 봉사하러 오신분들이
교회분들도 아니었고 정말 제가 보기엔 천사같은 분들이었는데 만약 그분들이 불교나 무교라면 어떨가 기독교인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답변:
당신은 예복을 입었습니까?
마
태복음 22장 1~14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비유를 사용하여 설교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당신의 복음을 끝까지 거절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이 마쳐질 것과, 복음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진 후 복음이 이방인들과 세상에 전파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초청하신 잔치에는 참석하였지만, 마땅히 입어야 할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 때문에 쫓겨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서, 예복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두개의 비유를 통해서, 임금은 세번에 걸쳐서 손님들을 잔치에 초청하는데, 그
때마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임금의 초청을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초림하셨던 시대부터 세상 끝에 있을 재림 때까지 세번에 걸쳐서 복음의 초청장을 인류에게 보내고 계신다. 세번째 초청을 마치신 다음에는 초청에 응하여 온 손님들이 예복을 제대로 입고 왔는지를 검사하는 심판의 장면이 나오면서 이 비유는 끝난다.
첫번째 초청장은, 예수께서 3년 반 동안 지상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기간 동안에 보내어졌고,
두
번째 초청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 A.D. 34년에 스데반이 그리스도 교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됨으로써,
이스라엘을 위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고,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할 때까지 보내어졌으며, ** (이스라엘을 위한 은혜의
기간에 대한 예언은 살아남는 이들 제9호, 25페이지를 참조할 것)
세번째 초청장은, 지금 보내어 지고 있는 초청장으
로서,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이방인들을 향하여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때부터 세상을 위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는 순간까지 보내어
지는 초청장을 말한다. 이제, 세번에 걸쳐서 전파되는 하나님의 초청과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첫번째 초청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싫어하거늘.” 마태복음 22:1~3.
혼인 잔치의 초대장을 보낸 발송인은
임
금이었다. 그러므로 초청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큰 특권으로 여기면서 감사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왕의 초청에
무관심하였으며 가치없는 것으로 여겼다. 잔치에 참석하라는 첫번째 초청의 기별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을 통해서 전달되었지만,
유대인들은 그 복음 잔치에 참석하기를 “싫어하”였다(3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칠십인을 보내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하였으므로 회개하라는 기별을 전하였지만, 그 초청은 그들의 관심을 이끌지 못하였고, 청함을 받았던 자들은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금은 다시 종을 보내어 두번째 초청장을 보내게 되었다.
2. 두번째 초청
“
다시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태복음 22:4~7
임금이 두번째 초청장을 보낼 때에는 사람들
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완벽한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4절. 임금이 두번째로 보낸 이 기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음으로써,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희생을 보여주신 후에 보낸 초청의 기별이었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은 끝내 거절하고 말았다.
오순절에 내려진 놀라운 성령의 권능이 기별을 전하는 종들에게 충만하게 함께 하였지만, 두번째 초청장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백성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말았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5절
그
들은 초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초청장을 전하는 종들을 크게 핍박하였다.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6절. 수많은 종들이 옥에 갇히고 스데반과 야고보와 같은 주의 종들 중 몇 사람은 순교를 당하였다. 이리하여
유대민족은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장을 완전히 거절하였다.
그
들이 복음의 초청장을 끝까지 거절한 결과로 어떠한 비극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비유 가운데 예언되어 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7절. 복음의 초청을 거절한 유대인들에 대한 형벌은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면서 온 유대민족들이 세계 도처로 흩어지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예루살렘성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다니엘 9:26~27에도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는 사건으로 묘사되어 있다.
서기 70년, 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서, 성전은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으며, 110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 안에 포위된
채 굶주리고 불타서 죽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였던 사실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신의 진리와 복음을 끝까지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보호의 손길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다.
3. 세번째 초청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태복음 22:8~10
두번에 걸쳐서 보낸 초청장이 특별하게
선택된 유대 백성들로부터 거절당하자, 임금은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을 향하여 세번째 복음의 초청장을 보낸다. 임금은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고 종들에게 명하였다(8절). 그리하여 임금의
종들은 온 세상으로 흩어져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다(10절). 세번째 초청장을 받고 찾아 온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 속에 “악한 자와 선한 자”가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섞인 무리이다. 악한 자들은 이기적인
혜택을 얻기 위해서 왕이 초대하는 잔치에 참석하였다. 그들은 왕이 혼인 잔치를 베풀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과 수고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으며,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보상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다. 잔치를 찾아 온 악한 자들의 목적과 동기는 순결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임금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충성의 정신이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었다.
심판
“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1~14
고
대 시대에는 왕이 잔치를 위해서 사람들을 초청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할 때에 반드시 입고 와야 하는 예복을 함께 보내는 것이
통례였다. 이 비유에서도, 임금은 손님들에게 예복을 선물로 주었다. 손님들은 왕이 보내어준 예복을 입고 옴으로써, 왕이 자신을
초청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시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은 임금이 보내준 예복을 입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서 참석하였다. 그는 잔치의 참석을 위해, 임금이 요구하는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왕이 엄청난 값을
치루고 준비해둔 예복을 입는 일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친구야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라는
임금의 질문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임금은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는 최종 선언을
내렸다.
임
금이 잔치에 참석한 손님을 심사하는 일은 심판을 표상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음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는 자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자들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다. 영생이라는 최후의 보상을 나누어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결정된 심사 결과대로 상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히 오리니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2.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를 따라서 상과 벌을 받게
된다.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성품과 생애와 행위를 심판받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예복의 의미
이
제,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인 “예복”에 대한 공부를 해보자. 우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예복”을 입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왜냐하면 잔치에 참석하였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어둠 속으로 쫓겨나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복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순결한 품성을 표상한다.
요
한계시록 19장에는, 하늘 왕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표상된 교회와 혼인 예식을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이제 그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요한계시록 19:7,8 (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이제 “예복”이
상징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마태복음 22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혼인예식에 참석한 손님들로 비유되었지만,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순결한 교회를 상징하는 신부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식에 참석한 손님들이 입고 있는
“예복”은,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신부가 입고 있는 “흰 세마포”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예복=흰세마포). 그렇다면 예복 곧 흰세마포는 무엇인가?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요한계시록
19:8. 성경은 흰 세마포를 성도들의 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세번째 초청을 받고 하늘 왕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복”을 입고 참석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의”의 옷을 입고 참석해야 할 것을
뜻한다. (예복=흰세마포=성도들의 의)
성도들의 의(righteousness, 의로움)란 무엇인가?
순
결한 흰세마포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던 옷이다. 그 옷을 입은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애정과
충성을 하나님께 바치는 생애를 살았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신실한 삶을 살았다면, 그들이 입었던 의의 세마포는
언제까지나 그들을 둘러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자, 그들과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되었고, 저희를 둘러쌌던 빛의
옷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화과 잎사귀를 엮어서 몸을 가리움으로 하늘의 옷을 대신하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입고 있지 않는 의의 옷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선한 행위나 자선으로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가리우려고 한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공로나 행위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애를 쓰고 있다.
그
러나 어떤 것도 “성도들의 의”를 대신할 수 없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여 천사들과 함께 참석할 사람은
무화과나무의 잎이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없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이사야 64:6).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여 주시는 예복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 왕인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이 예복은 진실로 회개하고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입혀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역사의
마지막 교회로 표상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권고하셨던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제14호 참조).
그
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쓰신
상태에서 모든 율법에 일치하는 의로운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모든 계명을 지키는 순결한 삶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해 놓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나누어 받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성도들이 될 수 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
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에 굴복되며, 우리의
정신은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드디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율법에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로서, 경건의 비밀을 설명하였던
것이다(빌립보서 2:5).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자들만이 성품과 생애가 변화된 삶을 삶으로서, 율법의 높은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게 된다.
의(righteousness, 의로움)란 무엇인가?
의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와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죄이다. 그런데 죄는 무엇인가? 성경은 죄에 대한 가장 명백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한일서 3:4. 죄가 법을 범하는 것이므로, 의는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하였던 것이다(롬 6:16). 물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순종이란, 바리새인이 하는 것과 같은 외식적 순종이 아니라, 순결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한 성품은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순종하는 선한 행위로 나타날 것이고, 악한 성품은 율법을 범하고 진리를 거절하는
악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줄 것이라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계22:12). 우
리가 오직 예수의 이름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그분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 속에 품음으로써, 변화된 성품을 가지고 거룩한 생애를 살지 않는 한, 구원과 영생은
보장될 수 없다.
사
도 요한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요일 3:24).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순결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사단은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거짓 복음을 뿌려
놓았다;
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율법이 폐하여졌다”
: 사단의 이러한 거짓말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그리스도의 선언에 의해서 그 모순이 드러난다(마 5:17).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은 사람이 율법을 범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율법을 폐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구태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본을 따르도록 명하셨다(요 15:10).
2. “인간은 결코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 대개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목사들과 교인들에 의해서 지지받고 있다. 사실상,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참된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여기에 나오는 권세는 우리 속에 있는 권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통하여 마음이 새롭게 창조함 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죄를
정복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
예복을 입은 사람들의 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4.
우
리는 이 비유의 마지막 절에서 가장 두렵고 슬픈 말씀을 대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금의 초청을 받아서 혼인잔치에
참석하였지만,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이 잔치에 끝까지 남아 있도록 허락되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손님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채 잔치에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무성히 자라나고 있는 가라지들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단지 인간적인 도덕가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애를 세상에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하며, 자신의 생애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자들이다. 그
들의 생애는 세상 사람들의 생애와 별다른 차이점을 나타내지 못한다.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가 높이는 율법을 보고서 교회로 돌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율법을 무시함으로써 세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기를 갈망하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생애를 따라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영생의 면류관은 바라보지만, 좁은 길 위에 놓여져 있는 십자가는 싫어한다.
비
유 가운데 임금이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라는 물음에 그 사람이 “유구무언”이었던 것처럼, 마지막 큰
심판날에도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런 핑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로 진리와 율법을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지만, 그 날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게는 놀라운 빛이 주어져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구약 성경만이 주어졌지만, 우리들에게는 구약과 신약이라는 놀라운 빛이 주어져 있다. 영생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은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
세상 끝이 마쳐지려는 이 때, 예복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초청이 우리 모두에게 들려지고
있다. 누가 그 부르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응할 것인가? 조심하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유의하라.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