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첩 이야기(사사기 마지막 부분)

어느  첩  이야기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그리스도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주는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

진 셀던

사사기 19-21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推理小說같다. 이 사건에서 각 인물들은 죄의 유무가 명백하게 가려지지 않는 모호한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평화적인 해결도 없고 만족할 만한 결론도 없이 잔인하기만 했던 이 실제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남기며 끝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건은 마치 어느 기자가 쓴 기사처럼 전개된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사는 어느 레위 사람에게 첩이 있었는데, 그 첩이 남편에게 화가 났는지 유다 베들레헴 땅에 사는 그녀의 가족에게 돌아간다. 넉 달이 지난 후, 그 레위 사람은 그녀를 데리고 오기 위해 그녀를 찾아 간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그녀의 아버지하고만 이야기를 나누웠고 그녀에게는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레위사람은 끝내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비극

해가 저물었을 때 그들은 여행자들이 으레 유숙하는 여부스의 가나안의 도시에 이른다. 그러나 레위 사람은 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까지 가기를 고집한다. 날이 저물어 그들은 기브아에 도착한다. 그들은 밭에서 돌아오는 누군가가 자신들을 집으로 불러주기를 바라며 성읍 거리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한 노인이 그들을 발견하여 집으로 불러들였는데 그 노인은 본래 에브라임산지 산지 사람이었고 기브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들이었다. 그 성읍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려는 그의 계획에 대한 노인의 염려는 기브아가 안전한 마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첫 번째 암시이다.

집주인이 레위 사람과 더불어 식사를 하려고 할 때, 마을의 폭도들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의 손님인 레위 사람을 끌어내어 밤 동안 그를 능욕하기를 요구한다. 주인은 그의 딸과 레위 사람의첩을 그들에게 대신 내어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한다. 폭도들이 그 선물을 거절하자 레위 사람이 중재를 한다. 그는 그의 첩을 폭도들에게 떠밀어 밤새도록 농락하게 한다.

그날 밤의 능욕과 고통의 묘사는 단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끝난다. 이 간결함이 첩에 불과 했던 그녀의 신분을 무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첩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도 끔찍했던 밤의 고통을 덜기위한 고의적인 시도인가? 혹은 격렬한 비극의 절제된 요약인가?

해설자는 여기서 느린 동작으로 전환하여 새벽 미명과 대조되는 그 길었던 밤의 결말을 자세히 서술한다. 그들은 밤새도록 농락했고 아침이 되기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들은 새벽 동이 틀 때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드디어 아침을 맞았고 자신의 주인이 자고 있는 집 앞에 엎드러져 날이 밝기까지 누워 있었다.

그녀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고대 근동에서 태양은 반드시 일어난 악행을 폭로하는 존재였다. 여기서 빛은 어둠 속으로 슬금슬금 도망치는 강간범들과 새벽까지 능욕을 당하고 온 몸이 드러난 채 뒤틀린 자세로 누워있는 여인의 몸 그리고 그녀의 괴로운 몸짓과 손과 무릎 그리고 두 발을 비춘다. 그리고는 다시 고통스럽게 발을 질질 끌며 남편이 있는 곳을 향해가는 여인을 비춘다. 집안에서는 집주인과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고통을 잊은 채, 아직도 고요히 잠들어 있다. 가까스로 그녀는 그 집 앞에 도착한다. 그녀는 목적지 바로 앞에서 쓰려졌고 남은 힘을 다하여 두 손을 뻗어 문을 만지려고 한다. 그것도 실패하여 그녀의 손가락만이 간신히 문지방에 닿는다. 그곳에서 그녀는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까지 십자가 모양으로 누워 있다.

그녀의 이러한 움직임은 전체 이야기에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유일한 진술이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말을 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그 레위 사람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는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오다가 문 앞에서 그를 막고 있는 첩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라는 세 마디 말을 한다.

철저하게 냉담한 그의 무정함은 이 이야기에서 “누가 죄인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 이후에 그가 취한 행동은 더욱더 그 질문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다시 그 첩은 살아있었는가? 죽어있었는가? 하는 모호한 문제가 생긴다. 헬라어 「70인역」은 죽었다고 말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다. 우리가 두 기사에서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녀를 나귀에 싣고 집에 가서 그녀의 몸을 12등분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통제 불능

그것을 받고 놀란 11지파는 모여서 레위 사람의 설명을 요구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바뀐다. 레위 사람의 입에서 사건의 내용은 왜곡되고 심지어는 거짓증언까지 했다. 첩의 강간과 살인이 아니라 한 성직자, 즉 레위 사람을 고의로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지역의 폭도들이 아니라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후에 일어나는 베냐민 지파에 대항한 전쟁을 야기한 것은 목격자도 아닌 스스로 희생자라 주장하는, 이 사건에서 중심인물(그가 말한 이야기에서)에 의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나서 저주의 행동으로서 분명하게 드러난 죄로 한 사람, 혹은 한 마을을 파괴하는 전쟁이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정당한 과정을 위해 제정된 구약의 몇몇 분명한 계율을 위반했다.

1. 기브아의 죄는 레위 사람의 증언에만 기초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두 명의 증인이 더 있어야 했다(참조 신 17:6).

2. 아무런 조사도 없이 기브아는 금기 사항 위반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되었다(참조 신 13:14).

3. 거론된 죄는 우상숭배나 이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유죄라 주장하는 단 두 항목뿐이었다(참조 신 7:1~5, 13:1~18).

전쟁은 이렇게 해서 반발적인 보복으로 제안되었고,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베냐민 지파를 태웠다. 이 전쟁은 베냐민 지파의 온 마을을 강탈하고, 모든 여자, 노인,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 죽였으며 전쟁이 끝났을 때 베냐민 지파는 겨우 600명만이 살아남았다. 만약 이 이야기가 요셉 이야기의 후편이었다면, 야곱이 두려워했던 죄악의 상황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창42:4,36).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의 거짓소송은 원래의 죄보다 2만5천 배 이상의 죗값을 치르게 하는 전쟁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금방 결판나지 않았다. 동맹한 지파들의 군사는 한 작은 지파에 의해 두 번이나 반격을 당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 다시 엎드려 울며 반성했다. 그러나 그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묻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집을 보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허락하심으로 그 전쟁은 끝났고 베냐민 지파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삿21:15)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겁에 질린 이스라엘은 그 지파를 경계한다. 그들은 살인자의 지파가 다시 채워지기 위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딸을 주는 것을 금했다. 베냐민 지파는 다른 마을에서 처녀를 잡아옴으로 종족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고도 여전히 200명의 여자가 부족하여 베냐민 지파의 남은 사람들은 그 부족이 채워질 때까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올 때 그들을 붙들어 아내로 삼았다.

이리하여 야베스 길르앗의 강탈과 실로의 여인들을 붙들어 가는 등, 원래의 죄는 계속되었다.

누가 죄인인가?

그 여인은 남편의 집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남편의 욕설을 퍼붓는 본성 때문에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을 우리가 비난할 수 있는가?

여인의 아버지는 딸이 남편과 함께 돌아가도록 겁쟁이처럼 행동했다. 그 역시 사위를 두려워하여 결국은 양보한 것인가?

집 주인은 손님들을 더 잘 대접하지 못했으므로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가 폭도들을 두려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는가? 기브아의 성읍은 그 폭도들을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넘겨 처벌받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지었다. 그러나 누가 폭도에 들어 있었는가? 누가 진상을 알고 있는가?

범죄자들이 가장 확실한 죄인들이다. 많은 범죄자들처럼 그들은 범행 후에 달아났을 것이다. 그들은 600명의 생존자들 중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의 11지파들도 죄를 지었다. 그렇지 않은가? 왜 그들은 레위 사람의 이야기를 조사해보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들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중하지 않고, 방자하게 멸망시킬 수 있었는가? 그들은 양처럼 옳다고 믿는 거룩한 지파의 한 사람 말만을 따랐을 뿐인가?

레위 사람은 어떤가?  그에게 죄가 있는가?

그 첩은 아마도 칼을 대기 전에 죽어 있었을 것이다. 거룩한 레위 지파 한 사람의 목숨이 그녀의 것보다 더 중요했는가?

그래서 아마도 그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 인류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짓는 가장 큰 죄를 구체화 시키는 사람이 바로 이 레위 사람이다. 그의 죄는 이 사건에서 다른 모든 사람의 죄를 능가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성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극악하다.

첫째로 그는 첩을 자신만의 이기적인 필요를 위해 이용했다. 그에게 그녀는 그의 이익을 위해 즐기기 위한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개성을 무시한 채 그는 그녀를 존중하지 않았고, 위엄도 없고, 선택의 자유도 없고 저항의 목소리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류가 갖도록 되어있는 사랑과 신뢰도 없는 존재로 대했다.

완고하고 충고를 듣기 싫어하는 레위 사람은 그의 직분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위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첩의 아버지의 호의를 거절하고 종의 요청도 무시해 버렸다. 그는 무정하게 첩을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내던졌다. 그리고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첩의 고통 비명소리는 잊은 채 밤새 편안히 잠을 잔다. 그녀가 그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녀를 장애물로 취급하고 그를 위해 강요되었던 그녀의 희생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나 그녀의 상태에 대한 동정심이나 두려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마치 그녀가 고깃덩어리인 양 그녀의 몸을 조각냄으로 잔악한 자신의 태도를 잘 나타내 보인다. 그는 모든 자기중심적인 것에 대하여 진실을 속이는 증언을 한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폭도들이 그녀에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에게 하려고 했던 일이다. 요약하면 그의 성격은 성령의 열매와 다르며 심지어는 전혀 인간답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레위 사람은 이 시간 이전에 첩의 개성과 인권을 짓밟음으로써 그녀를 살해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택의 자유를 실제로 누린 것은 오직 그녀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위한 시도로 그녀의 아버지의 집을 향해 떠났던 그날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감정적으로 이 이야기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기회가 닿을 때나 가끔 그것에 대해 토의 한다. 사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무시한다.

또 다른 비극

여기에 우리가 실제로 거리를 두고 있는 우리에게 더 친숙한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한 나귀위의 여인에서 시작하여 수욕을 당하고 상처 입은 십자가의 희생자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누가 죄인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대답이 없는 채로 남아 있다.

그 악당들은 어둠이 깔린 후 인성을 쓰신 그들의 창조주를 폭행하고 밤새도록 그의 몸을 강탈했다. 그를 고소한 것이 진실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첩처럼, 그들의 능욕 앞에서 침묵을 지켰다. 새벽 동이 틀 무렵 그는 차가운 골고다를 향해 성문의 문턱을 넘어 십자가를 지고 간다. 그의 손은 십자가에서 미끄러지고, 그는 땅바닥에 쓰러진다. 거기서 그는 그녀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죽어간다. 문지방을 만지며 탄원하는 그녀의 손은 한 질문을 외친다. 십자가의 못 박힌 그의 손은 인류의 고통의 영원한 물음을 안는다. 그리고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라는 레위 사람의 매정한 명령처럼, 무리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친다.   그리고 둘 다 침묵으로 응답한다. 그 침묵은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진술이다. 우리는 모두 살인죄를 저질렀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능욕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실패하여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하는 거룩한 전쟁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속죄함을 입을 수 있는 곳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계속하여 무시할 때 우리가 어떤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 말해 준다. 두 번째 예수님의 이야기는 첫 번째의 이야기의 비극적인 종말로부터 구원을 받게 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구약의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가 말이 전혀 없으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처음과는 달리 그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그리고 사실 레위 사람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폭도들도 그러지 못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도 그러지 못했다.

새로운 시작

여기가 우리의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곳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우리이야기에서 나쁜 사람을 만난다. 다른 사람의 명성을 강탈하려는 마음, 우리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난,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행동을 정죄하기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숨기는 것, 우리의 무뚝뚝한 명령과 합리적인 생각의 분함, 우리의 동정심 없는 태도, 우리의 이기심, 변덕스러운 의지, 진리를 쫓고 우리의 선입견에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기를 거절하는 마음, 보증되지 않은 거룩한 전쟁, 이런 것들이 다시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발견할 때, 그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죄와 의를 분별하는 능력과 그의 성품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악인이 누구인지 깨닫는 사람만이 그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백성이 되어 십자가의 발아래에서 새로운 차원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될 수 있다. 인종차별, 민족주의, 거룩한 전쟁을 넘어 어린양의 본성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고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본성으로 각 지파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동서도 없고 야베스 길르앗이나 미스바도 없고 좌파나 우파도 없고 에브라임이나 베냐민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나 헬라도 없고 벧엘이나 실로도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도 없고 인종이나 성별의 차별도 없다.

십자가의 결과인 갈3:28절이(삿19-21장이 아니라) 속히 우리 재림교인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게 되기를 바란다.

필자는 미국 캘리포니아 P.U.C 신학과 부교수이다..

어느 첩 이야기(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대한 6개의 생각

  1. 승환

    저한테 감사해주셔서 고마워요. 2001년 1월 교회지남에 실렸던 글이에요. 읽을 때마다 예전에 몰랐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되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는 좋은 글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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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승환

    나누고자 올렸습니다. 아카데믹하면서 사랑이 듬뿍 담긴 이성과 감성의 최상의 조화가 담긴 글이라서 너무 인상깊었어요. 비교와 대조도 인상깊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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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승환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 지파간의 다툼으로 끝이 나지만 이 글의 마지막부분의 저자의 바램처럼 그리스도 십자가 밑에서 모두 하나가 되는 세상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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