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보관물: 김주리

결혼

 비성서적인 결혼

 우리는 결혼 문제에 대한 열광이 임박한 그리스도의 오심의 징조 중 하나가 되어 있는 마지막 날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이 문제에 있어서 의논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다. 변화되지 못한 마음의 충동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신앙과 의무와 원칙이 희생된다. 두 사람의 결합을 과시하거나 지나치게 경축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보다 나은 입장에서 두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결혼은 백쌍 중 하나도 없다. 불행한 결혼의 잘못된 결과들은 부지기수이다. 그들은 충동에 의해 맺어진다. 그 문제에 대한 솔직한 검토는 거의 고려되지 않고 경험있는 자들과의 의논은 낡은 사고 방식으로 간주된다.



 충동과 성화되지 못한 정욕이 순결한 사랑의 자리를 차지한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결혼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영혼을 위태롭게 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그들에게 초래한다. 나는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어떤 자들이 불신자들과 결혼함으로 큰 실수들을 범한 경우들을 보았다. 그들은 불신자 쪽에서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이루어진 후에는 그가 전보다 더 멀리 진리에서 떠나간다. 그리고 믿는 쪽을 믿음에서 떠나가게 하고자 원수는 교묘한 활동과 끈질긴 노력을 시작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불신과 밀접히 관련시켰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관심과 확신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은 의심과 의문과 불신의 공기를 호흡한다. 그들은 불신을 보고 듣고, 마침내는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영향을 저항하기 위해 용기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들의 믿음은 모르는 사이에 침해를 당하고 마침내 파괴된다. 이와같이 사단은 그의 계획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기의 대리자들을 통하여 너무도 조용하게 활동해 왔기 때문에 믿는 자들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조차 생각하기 전에 믿음과 진리의 장벽들은 제거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결연을 이루는 것은 위험하다. 사단은 많은 젊은 남녀들이 결혼으로 그들의 신앙적 경험과 유위성(有爲性)의 역사를 종결짓는 것을 목격하게 될 시간을 잘 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아갈 길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한 동안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유지하고자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은 견고한 반대 세력의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한때는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하나의 특권이요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게 된 자가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흥미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알고서는 그 문제를 마지못해 거론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귀중한 진리를 믿는 믿음은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사단이 교묘하게 회의심의 천을 그들 주변에서 짜게 된다.



 합법적인 것일지라도 극단으로 치우치면 심각한 죄가 된다. 진리를 공언하는 자들이 불신자들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짓밟는다. 그들은 그분의 은총을 잃어버리고 회개해야 할 쓰라린 일을 저지른다. 불신자가 탁월한 도덕적 품성을 소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그처럼 큰 구원을 등한히 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런 연합을 이루어서는 안된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 불신자의 품성은 예수께서 꼭 필요한 것이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신 그 젊은이의 품성과 유사할 수 있다.



 불신자가 종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한 가지 외에는 배우자로서 요망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호소하는 일이 간혹 있다. 신자 쪽에서 조금만 판단을 잘하면 불신자와 일생을 연합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건만, 십중팔구의 경우는 감정이 승리한다. 영적 타락은 결혼 서약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신앙적 열성은 시들어지고 보루는 하나씩 차례로 무너져 마침내 두 사람은 사단의 검은 깃발 아래 나란히 서게 된다. 피로연에서까지도 세상의 정신이 양심과 믿음과 진리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다. 새 가정에서는 기도의 시간이 존중되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택하였으며 예수님을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불신자가 새 관계에서 반대의 표를 나타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 진리에 관한 주제가 주의와 고려의 대상으로 제시되면 즉시 감정을 나타낸다.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결혼했소. 나는 방해받고 싶지 않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독특한 견해에 관한 대화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오.” 신자가 만일 그의 믿음에 관하여 어떤 특별한 열성을 나타내게 되면, 그것이 그리스도인 경험에 관심이 없는 자에게 대한 불친절처럼 보일 수도 있다.



 믿는 자는 그가 선택한 배우자에게 무엇인가를 양보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다. 사교적·세속적 오락들이 제공된다. 처음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감정의 저항이 크게 나타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 차츰 적어지고 믿음이 의심과 불신으로 바뀌어진다. 한 때 확고하고 양심적인 신자요, 헌신적인 그리스도의 추종자였던 사람이 지금처럼 회의적이요, 우유부단한 사람이 될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 그것은 현명하지 못한 결혼에서 초래된 변화가 아닌가!



 신앙의 건전한 원칙을 시험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본받을 만한 확고한 자세로 그는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나는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주일 중 일곱째 날이 성경상 안식일인 것을 믿는다. 우리의 믿음과 원칙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우리는 함께 행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더욱 완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 계속 나아갈 것 같으면 나는 점점 더 세상과는 달라져야 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동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진리에 대한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나는 당신이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사랑할 것이다. 신령한 것들은 영적으로 분별된다. 영적인 식별력이 없이는 당신이 내게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볼 수가 없고 내가 섬기는 주님께 대한 나의 책임을 깨달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가 신앙적인 의무 때문에 당신을 등한히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며, 내가 하나님께 바치는 애정 때문에 질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앙적인 신조 안에서 혼자 있겠다. 당신의 견해가 바뀌어질 때,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요구에 반응하게 될 때, 그리고 당신이 나의 구주를 사랑하기 위해 배우게 될 그 때에, 우리의 관계는 새로워질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그의 양심의 지시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희생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모험을 하여 잃어버리기에는 영생을 너무도 값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예수님보다는 세상을 택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멀어지게 하는 자와 생애의 관심을 함께 하기보다는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 애정을 주는 위험은 깨닫지 못한다. 젊은 마음에는 결혼이 로맨스로 옷 입혀져 있다. 그러므로 상상 속에 숨겨져 있는 이런 모습을 벗겨 버리고 결혼 서약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감을 마음에 새겨 주는 일은 어렵다. 이 서약은 죽음의 손 이외는 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띠로써 두 사람의 운명을 묶어 놓는다.



 영광과 존귀와 불멸과 영생을 구하고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군사로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자와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그대의 주인으로 택하여 모든 일에 그분께 순종하노라고 공언하는 그대가 흑암의 세력의 왕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자와 그대의 관심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러나 이 얼마나 이상한 모습인가! 매우 밀접하게 결합한 사람들이 하나는 신앙에 전념하고 다른 하나는 무관심하고 부주의하다. 한 사람은 영생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을 때, 다른 하나는 죽음으로 가는 넓은 길을 걷고 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과 결혼한 결과로 그리스도와 하늘을 희생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더 좋아할만큼 그리스도의 사랑과 친교의 가치가 그들에게는 그렇게도 하잘 것 없는 것일까? 귀하신 구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위해 하늘의 기쁨을 즐겨 희생할 만큼 그들에게는 하늘이 그처럼 사소하게 평가된단 말인가?



 결혼 생활의 행복과 번영은 양편의 연합에 좌우된다. 육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동화된 마음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은 육신에 씨를 뿌리고, 마음의 충동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성령의 씨를 뿌리고, 이기심을 억제하고 성향을 극복하며, 그가 종이 된 것으로 공언하는 그 주인에게 순종하는 생애를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취향과 성향과 목적에 영구적인 차이가 있다. 만일 신자가 그의 확고한 원칙의 고수를 통하여 회개하지 않은 자를 구원하지 못할 것 같으면 너무도 흔히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용기를 잃고 하늘과 연결되지 않는 가련한 동료를 위하여 그의 신앙의 원칙들을 팔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과 결혼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셨다. 이 금지는 히브리인들이 우상숭배자들과 결혼하지 못하게 하고 이교도의 가족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교도들은, 진리의 빛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끈덕지게 거부하는 이 시대의 회개하지 않는 자들보다는 훨씬 더 유리한 상태에 있었다. 오늘날의 죄인은 당시의 이교도보다 훨씬 더 죄가 많다. 왜냐하면 복음의 빛이 그의 주변을 온통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양심을 범하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이러한 결혼을 금하도록 하나님이 금하신 이유는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대 이스라엘 가운데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무시하고자 한 자들은 신앙의 원칙들을 희생하고 그렇게 했다. 솔로몬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라. 그의 처들이 그의 마음을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했다.”(4증언, 503-508)

한 사람의 기도-2만 명 침례..92%의 잔존율







“God is able!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십니다”








글쓴이 : 웹마스터 날 짜 : 08-12-26 03:48 조회 : 39





30대 초반 시반다 목사, 기도-성경통독 등 단순한 기별로 침례자 2만명 기록

레지널드 시반다(Reginald Sibanda) 목사. 얼핏 작은 몸집에 30대 초반의 실제 나이보다도 한참 어려 보였지만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일으킨 성령의 사역을 소개할 때 서중한합회(회장 황춘광) 소속 목회자 200여명은 경청하고 있었다. 지극히 단순한 메시지였지만 그 단순한 믿음으로 그는 수년 만에 2만 명의 침례자를 기록했고, 92%의 잔존율을 기록하고 있다.
“저는 하루에 4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을 즐깁니다. 때로는 800개의 기도제목을 갖고 기도합니다. 그중 2개 밖에 못할 때도 있고, 15개를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기도목록에서 지워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800개의 기도제목을 갖고 기도할 때 800개가 응답받습니다. 말씀을 믿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시반다 목사는 “믿음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며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성경을 더 많이 읽을수록 우리는 더 많은 믿음을 가지게 되고 더 많은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반다 목사는 지난 13년간 성경을 읽었다. 수없이 읽었지만 몇 번인지는 세어보지 않아 모른다. 그는 “처음에는 어렵지만 읽을수록 더 쉽게 이해된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첫 성경통독에서 단 2분을 읽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매일 성경을 통독하며 성장했고, 점점 더 성경 읽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3시간 동안 성경을 읽는 일이 쉬워졌고, 이제는 5시간을 읽는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결과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적게 읽는다면, 적은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적은 결과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떻게 얼마나 읽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자기 저평가는 하나님을 실망시킨다”
성경을 읽는 습관은 기도의 습관으로 이어졌다. 시반다 목사는 “성경통독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 삶을 변화시켰다”며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좋아하게 됐고, 여러 시간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처음 기도할 때 걸린 시간은 10분이었지만 이내 20분이 됐고, 3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을 즐기게 됐다. 지금은 새벽 2시부터 6시까지 기도한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낮게 평가할 때에 실망하신다. 그분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이 당신이 그들에게 놓으신 값에 의하여 자신들을 평가하기를 원하신다”(그리스도인 선교봉사 262). 시반다 목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두려워하거나, 작은 것을 계획하거나,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일을 두려워할 때 하나님께서는 실망하신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질 때 기뻐하신다”며 “성경을 읽을 때 믿음을 갖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하고, “그분이 미소 짓고, 들뜨시며, 어린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소리 내어 웃으실 것”이라며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시반다 목사는 “좋은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또한 기뻐하신다”며 “우리가 큰 것들을 요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은 것(the highest things)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 큰 것들을 요구할 때 하나님의 큰 종이 될 것”이라며 “거짓종교들이 망하게 하고, 내 구역 사람들이 성경을 사랑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여러분의 권리”라고 힘주어 말했다.

황춘광 합회장 “한국교회 적용이 관건”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모든 교인들은 적극적으로 선교사업에 참가해야 한다. 그들은 이웃에 있는 가정을 방문해 그들이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선교봉사, 12). 예언의 신의 말씀을 인용한 시반다 목사는 이내 2003년도에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한 선교구역에 배정된 그는 지역 장로에게 그 지역의 ‘영적 상태’를 물었다.
6만 명이 거주하는 광활한 지역에 집회소 9개와 200여명의 성도들이 있었다. 소수였다. 시반다 목사는 즉시 기도목록을 작성했고, 상황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지역을 22개 소그룹으로 나눠 소그룹지도자를 세운 뒤 이들을 방문해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성경교수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리더들은 이웃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해 22개의 전도회를 동시에 개최했다. 강사는 소그룹 지도자들이었고, 이 전도회를 통해 2100명이 진리를 받아들여 2300명이 넘는 교인이 확보됐다. “그것은 시작이었습니다.” 시만다 목사의 말처럼 그의 사역은 성공을 거듭했고, 지난 20년간 신도 273명에 정체됐던 짐바브웨 뭬네지는 어느새 2만1256명의 성도를 보유하게 됐고, 이중 60%가 청년이었다.
그의 성공적인 사역은 지난해 4월 대총회를 통해 전 세계 재림교회에 알려졌고, 황춘광 합회장은 애초 직접 짐바브웨를 방문하려던 계획을 바꿔 그를 이번 목회자협의회로 초청했다. 황 합회장은 “90%가 넘는 잔존율이 놀랍다”며 “식량원조 등을 쓰지 않고 순수하게 말씀사역을 통해 이룬 성과를 한국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취재 후기
시반다 목사와의 첫 만남은 지난 8일(월) 서중한합회 목회자협의회가 열린 사슴의 동산에서였다. 마침 운전이 쉽지 않을 정도로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은 날이었다. 강의시간 사이 휴식시간에 만난 시반다 목사는 “기왕 사진을 찍을 것이라면 바깥에서도 찍어 달라”고 말했다. 눈을 처음 본다고 했다. 설경(雪景)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그의 눈이 유독 반짝였다.
두 번째 그를 만난 것은 정확히 1주일이 지난 15일(월) 한국연합회 입구였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차량 유리의 진한 빛가림(썬팅, Window tinting)에도 불구, 먼저 알아보고 거수경례를 했다. 1주일 전 만났을 때 떠난다고 했던 날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차에서 내려 악수를 나눈 뒤, 언제 떠나느냐고 묻자 그날 늦은 11시 45분 비행기로 출국한다고 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어느새 한국에 정이 들었나보다. 특유의 해맑은 표정 뒤로 언뜻 섭섭함이 스친다. 분위기도 바꿀 겸 “당신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강연내용을 중심으로 기사를 쓰려고 한다”고 하자, 시반다 목사는 크게 웃으며 “정말이냐”고 물어본 뒤, “아주 좋다”며 “대신 기사를 쓰면 꼭 나에게 이메일로 보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보내는 건 문제가 없는데 한글로 된 기사라 읽기는 힘들 것”이라고 했더니 “그래도 보내 달라”고 말하고, “사실 이번에 한국 이름이 생겼다”며 “‘왕’이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그런데 ‘왕’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영어로 하면 ‘킹(king)’이다”고 말해주니, 냉큼 “아, 그러면 나는 ‘왕’이 싫다”며 “나는 ‘신하(servant)’가 좋다”고 답한다.
투박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젊은 목회자. 언제쯤 또 그의 밝은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저를 힘나게 하는 한 가지는 우리가 앞으로 서로 만날 기회가 없을지라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다시 만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항상 여러분을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이름을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도전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시반다 목사의 강연 중에서)
이기호 actsky@hanmail.net


재림신문의 기사의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성서 예언과 성취과정 공부하세요

http://www.truthtv.co.kr/ 

저는 이 웹사이트의 손상백집사님 강의 동영상을 보면서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뜻 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는 경고를 받아 마땅한
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함부로 사용(방탕함)하고, 바벨론의 섞어진 지식의 혼합된 성경지식의 술에 취하여(술취함)
먹고 사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염려(생활의 염려)로 가득하였던 제 자신과
이 마지막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던 통탄할 만한
저의 상태를 깨닫고 통곡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기별이 아직 확신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성서예언을 연구할 수 있는 금같은 시간을
인터넷 웹서핑이나 컴퓨터 게임이나 친구들과 수다떠는 것이나  TV 드라마나 , 소설, 만화 , 영화를 보는 일에 사용하지 
않았는지요,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고 기도해 놓고 뒤돌아 서면 내 향락과 만족만을 추구하느라고 
헛된 곳에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합시다. 

 많은 안식일 교인들이 명목상 안식일 교인으로… 마지막 심판의 때에
“강도”라는 죄목으로 멸망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함부로 사용하는 강도 짓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회개합시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사적으로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고 세상 역사를 살피는 슬기로운 처녀가 됩시다.

살 길..

 “나는 한 천사가 저울을 그 손에 들고 서서 하나님의 백성, 특히 청년들의 생각과 관심을 달아 보는 것을 보았다.
저울 한 편에는 하늘로 향하는 생각과 관심들이 있었으며, 다른 편에는 땅으로 향하는 생각과 관심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소설책들을 읽는 모든 것과 의복, 외모, 허영, 그리고 교만 등에 관한 생각들이 실려 있었다.
 오, 얼마나 엄숙한 순간인가! 하나님의 천사들은 저울을 들고 서서 하나님을 믿노라 고백한 그분의 자녀들 즉 세상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생각들을 달고 있다. 세상과 허영과 교만에 대한 생각으로 찬 저울판은 그 무게가 계속 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내려갔다. 하늘로 향한 생각과 관심들을 담은 저울판은 다른 쪽이 내려감에 따라 신속히 올라갔는데 오, 얼마나 가벼웠던지! 나는 내가 본 광경을 본 그대로 묘사할 수는 있으나, 천사가 저울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각과 관심들을 다는 것을 보았을 때 나의 마음에 찍힌 엄숙하고 생생한 인상은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천사는 “이런 자가 하늘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희망은 헛것이므로 속히 회개하고 구원을 얻지 못하면 분명히 멸망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라!”고 하였다.”(1보감, 24)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지 마십시오.
 생각은 열역학 제2법칙처럼 무질서, 혼란, 죄로 흘러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생각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키십시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영성을 파괴할 위험이 있는 악에 빠져 있다. 그것은 거룩한 성경에 대한 매력과 흥미를 잠식해 버릴 것이다. 그것은 어떤면에서나 하나님을 섬기는데 바쳐지는 마음에 유익한 영향을 주지 못하는 소설과 이야기와 그 밖의 다른 독서를 좋아하게 한다. 그것은 거짓되고, 불건전한 흥분을 자아내고, 상상력을 들뜨게 하고, 마음을 유용한 일에 부적합하게 만들고, 어떤 영적 활동에서도 자격을 잃게 한다. 그것은 심령을 기도와 영적 사물을 사랑하는 일에서 떠나게 한다. 거룩한 책에 빛을 비춰 주고 그 책을 연구하고자 하는 욕망과 열성을 일으켜 주는 독서는 위험하지 않고 유익하다. 그대들이 거룩한 성경책에서 눈을 돌려 신앙에 죽음을 가져다 주는 흥분적인 책들만 주목하고 있는 사실이 나에게 제시되었다. 그대들이 더 자주, 그리고 더 부지런히 성경을 숙독하면 할수록, 성경은 더욱 아름답게 나타나고, 경박한 독서를 더욱 싫어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매일 연구하면, 거룩하게 하는 감화를 마음에 받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하늘의 분위기를 호흡하게 될 것이다. 이 귀중한 책을 그대의 마음에 묶어 두라. 그리하면, 그것이 친구가 되고, 어려울 때 안내가 된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1증언, 241)